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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써니' 그녀들이 춤판으로 돌아간 까닭은?

- 광장무를 위한 변명

[월드리포트] '써니' 그녀들이 춤판으로 돌아간 까닭은?
지난주 금요일, 쌀쌀한 삭풍이 잠시 잦아 든 오후 베이징 시내 타오란팅 공원에 그녀들이 나타났습니다. 베레모에 위장복까지 아미룩 드레스 코드를 선택한 그녀들은 하나같이 쉬크한 롱부츠로 패션을 마무리했습니다. 큼지막한 선글라스 때문에 쉽게 나이를 가늠킨 어려웠지만 한 눈에도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미녀들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일사분란한 대오를 갖춘 그녀들은 지난 한해 중국 전역을 강타한 2인조 그룹 콰이디슝디(젓가락 브라더스)의 히트곡 '샤오핑궈(작은 사과)'의 빠른 비트에 맞춰 늘씬한 몸매를 현란하게 흔들며 군무를 추기 시작했습니다.
광장무

순식간에 광장엔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쉴새 없이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쉬가 터져나왔습니다. 관중들의 시선을 일시에 사로잡은 그녀들의 평균 나이는 53세. 손주 기저귀 갈아주며 드라마나 챙겨 볼 연세이건만 그녀들의 포스는 남달랐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같이 소싯적에 문화예술계에서 이름께나 날리던 이른바 왕년의 스타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새삼스레 극장이나 방송국 무대가 아닌 한 겨울 동네 공원 춤판에 나타난 이유는 뭘까요?

중국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아침이나 저녁이면 시내 이곳저곳에 자리한 광장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노래에 맞춰 군무를 추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름하여 광장무(廣場舞)라고 합니다. 주로 은퇴한 나이 지긋하신 노인들이나 연금으로 생활하는 여유있는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입니다. 단체로 전통의상을 맞춰 입은 채 한국 아이돌그룹의 댄스 뮤직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하고, 먼지 나는 시멘트 바닥에서 남녀 짝을 맞춰 신나게 볼룸 댄스를 추는 모습이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국적인 재미를 주곤 합니다.
광장무

그런데 지난해 광장무는 적지 않은 수난은 겪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 놓고 음악에 맞춰 헐렁한 추리닝(운동복) 차림의 아주머니들이 마구잡이로 몸을 흔들어 대는 모습을 두고 시끄러운 소음공해이자 보기에도 추한 시각 공해라며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습니다. 광장무를 곱게 보지 않던 주민들은 광장무 추는 아주머니들에게 오물을 퍼붓거나 맹견들을 풀어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민원이 끊이지 않자 각 지방 정부들은 스피커 소음규제와 공연시간 제한에 나섰고 광장무는 이제 도시의 격을 떨어뜨리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광장무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인민공사 등 정책을 통해 집단생활을 요구했던 공산당 정권은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던 인민들에게 이 광장무를 일종의 문화적 해방구로 적극 권장했습니다. 문화혁명(문혁) 때 이 광장무는 ‘모택동 충성무’로 대체돼 당 중앙의 극좌 혁명 노선의 선전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공산당 지도부는 모든 대학에도 집체무를 의무적으로 교육하고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학생들로 하여금 집단 공연을 하게끔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광장무의 수난기였던 셈입니다. 문혁의 종말과 함께 광장무도 부활했습니다. 개혁개방 이후 1980, 90년대에 들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도시들은 하나같이 시내 한 복판에 문화광장을 조성했는데 이곳이 바로 광장무 춤꾼들의 주 무대가 됐습니다. 2,30대에 그 시기를 보냈던 아가씨들과 청년들이 이제는 머리에 흰 서리를 맞은 채 동네 광장 한 켠을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광장무

광장무는 이웃들과의 소통의 통로이자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로 이어지는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건강 유지의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한 바탕 춤을 추고 나면 가정사로 인한 크고 작은 스트레스도 시원스레 풀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드세기로 유명한 중국 아주머니들이 남편들을 이 정도로나마 유하게 대해주는 것도 다 광장무 덕이라는 우스개까지 있을 정도로 광장무의 순 기능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인의 삶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집단주의적 색채의 광장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화려함에 취해 새롭고 젊은 것 만이 선이고 오랜 된 것 정리해야 되는 퇴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잣대가 더욱 뚜렷해지는 중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뒤안길로 물러날 위기에 처한 광장무의 초라한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중국의 아주머니들이 "우리도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감히 우리를, 또 우리의 시대를 무시하지 말라"며 떨치고 일어선 것이 바로 지난 금요일 타오란팅 공원의 작은 반란이었던 겁니다. 한 마디 구호나 한 구절 표어도 없었지만 그들은 영원한 광장무 홍보대사였습니다. 2011년 복고 열풍을 일으키며 7백만 명이 넘는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 모았던 우리 영화 '써니'가 떠올랐습니다. '써니'를 보며 아련한 회상에 젖었던 저였기에 세대간, 신구간의 갈등 한가운데 오롯이 섰던 '써니' 아주머니들의 반란은 신선했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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