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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대형 재난마다 등장하는 숫자 '36'의 비밀

[월드리포트] 대형 재난마다 등장하는 숫자 '36'의 비밀
문화권마다 터부시하는 숫자가 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6'과 '13'을 싫어합니다. 6은 '세상의 끝 날' 등장하는 '악마의 수'로 예언돼 그렇습니다. 13은 잘 아시는 대로 예수를 판 가롯 유다가 13번째 제자여서입니다. 서양판 각종 괴담에는 그래서 6이나 13이 흔히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대표적으로 '4'가 기피 대상 숫자입니다.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서입니다. 노골적으로 싫어합니다. 우리나라의 상당수 아파트는 4층 대신 F층이 있습니다. 영어 Four를 차용한 것입니다. 중국 아파트의 해법은 더 간단합니다. 아예 4자가 들어간 층을 모두 없앴습니다. 4층도, 14층도, 24층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는 13층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많이 살아서 그런가 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직원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13의 중국어 발음은 '스산'입니다. 이는 '뿔뿔이 흩어지다. 헤어지다.'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싫어합니다." 중국은 숫자와 관련된 터부가 더 많고 강한 듯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런 불길한 수에 36이 더해졌습니다. 발음상으로는 '산스류', 좋지 않은 뜻의 단어와는 무관합니다. 그럼에도 '마의 수'로 지목되는 이유는 36이 대형 재난에 단골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올해로 들어서기 직전인 지난해 12월31일 밤 11시40분 중국 상하이에서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상하이의 대표적 명소인 황푸강변 와이탄에 새해맞이 행사를 보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상하이시가 최종적으로 발표한 사망자수는 36명. 그러자 중국 네티즌들이 술렁였습니다. "또 36명인가? 어김없이 등장한 마의 수!", "대형사고 사망자 수는 언제나 36명. 공식으로 굳어졌다." 등등의 글이 인터넷과 SNS를 도배했습니다.
대형 사고1

'정말 그런가?' 사망자 수가 36명인 대형 사고를 찾아봤습니다. 상상 외로 많았습니다.

2014년 12월 31일 상하이 와이탄 새해맞이 축하객 압사 사고
2013년 3월 29일 지린성 파바오 탄광 가스 폭발 사고
2012년 10월 1일 홍콩 인근 해상 선박 충돌 사고
2012년 8월 26일 산시(陝西)성 옌안 심야 침대버스 추돌 사고
2011년 7월 23일 저장성 원저우 고속열차 추돌 사고 최초 사망자 발표
2007년 8월 13일 후난성 디시두안 대교 붕괴 사고
2006년 1월 29일 허난성 폭죽 공장 창고 폭발 사고
2005년 12월 22일 쓰촨성 고속도로터널 공사 현장 폭발 사고
2003년 12월 30일 랴오닝성 티에링시 폭죽 공장 폭발 사고
2000년 9월 30일 구이저우성 석탄 광산 가스 폭발 사고


이 사고의 사망자 수가 모두 36명이었습니다. 우연 치고는 대단히 많죠?

중국 국무원은 지난 2010년 대형사고 예방, 처리와 관련된 규정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사망자 30명 이상이면 곧 특대형 사고로 분류되며 해당 지역의 행정 책임자가 책임져야 한다. 사망자 수가 특별히 많거나 대외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고에 대해서는 해당 지역의 성급 행정 책임자가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30명 이상 숨지는 사고의 경우 우리로 치면 해당지역 기초자치단체장이 관리, 감독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구가 살짝 애매합니다. '사망자 수가 특별히 많거나…'의 경우 성급, 우리의 광역자치단체장까지 연대 책임을 집니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대략 36명 안팎이 그 분기점 아니겠냐고 의심합니다. 즉 40명대거나 그에 가까운 사망자를 내는 사고의 경우 광역자치단체장까지 책임을 묻게 되고 따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더 많은 사망자가 있어도 36명으로 축소 발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의혹에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실제 앞서 사례로 든 지린성 파바오 탄광 사고의 경우 최초에 발표된 사망자 수는 29명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초자치단체장에 해당하는 행정 책임자도 문책을 피할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 그러자 숨진 유가족들이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숨졌는데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수정된 사망자 수가 36명입니다. 냄새가 나죠?

2011년 발생한 원저우 고속열차 추돌 사고도 사망자 수가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보신대로 처음에는 36명 선에 맞췄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자랑하던 고속철 관련 사고인지라 해외 언론까지 취재 경쟁이 붙었습니다. 결국 최종 사망자 수는 39명으로 올라갔습니다.

지난 2008년 발생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재난인 원촨 대지진의 사망자수는 의혹투성이입니다. 공식적으로는 8만7천여 명입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의 말은 다릅니다. 20만 명을 넘는다는 것입니다. 일대에 살던 소수민족 챵족만도 10만 명 이상 숨졌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촨 대지진의 정확한 실제 사망자 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주민들은 전합니다.

대형 사고

그러다보니 중국인들은 당국이 발표하는 사망자 수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2012년 7월 22일 발생한 베이징 폭우가 있습니다.

베이징시 당국은 37명이 폭우로 인해 숨졌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다른 말이 돌았습니다. 베이징 근교의 양로원 2곳이 물에 잠기면서 수용됐던 노인 200명 이상이 숨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네티즌들이 들끓었습니다. 부랴부랴 베이징시 공안 당국까지 나섰습니다.

수사 결과는 '해당 지역 양로원 노인들은 모두 무사히 대피했고 사망자는 없다'였습니다. 오히려 처음 이 소식을 인터넷에 올린 한 네티즌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네티즌들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대형 자연재해나 사고가 발생하면 사망자 수를 둘러싸고 꼭 뒷말이 나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마의 수' 36에 네티즌들이 마뜩치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입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개선은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나옵니다. 다만 실패가 개선으로 연결되려면 명확한 사실 파악이 기초돼야겠죠. 그에 따른 정확한 책임 추궁과 신상필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힘 센 책임자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망자 수마저 오락가락 한다면 개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중국인들이 36을 '신비의 숫자'라며 비웃는 것은 그런 걱정의 발로이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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