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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피노키오 가이드북 ③ 수습과 마와리, 그리고 하리꼬미

[취재파일] 피노키오 가이드북 ③ 수습과 마와리, 그리고 하리꼬미
* 본글에 앞서

@ 사쓰마와리, 나와바리, 하리꼬미, 반까이, 야마, 우라까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 굳어왔다고 해도 그렇지, 일본어 잔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맞는 일일까?"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대체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좀... 문제 있는 일 아냐?"

기자 아닌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지적, 자주 받습니다. 입사 전까지 저도 이런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도제식 교육 과정에서 선배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귀동냥하다가 어느덧 제 입에서도 술술, 이런 단어들이 나오게 됐습니다. 이걸 문화라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엔 옳은 말, 바른 말 사용하는 데 앞장 서는 저희 직업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해서 논의가 오래되어 온 것으로 아는데요, 다음 글에 잘 나와있습니다. 참고로 읽어보시고요,

'한국어 속 일본어 은어' 뜻이나 제대로 알고 쓰자. - 일본과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 '당그니의 일본 표류기' (
보러 가기)

오늘 쓸 글에선 앞서 언급했던 일본어들이 자주 나올 것 같은데, 기자들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드린다고 하는 본래 기획의도에 따르면 이런 논의가 글 안에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여, 따로 말씀드립니다. 이것도 현재 기자들의 모습이라면 모습이겠네요, 은어로 굳어버린 일본어 잔재들을 알면서도 사용하는 기자들이요.




● (3) 수습과 마와리, 그리고 하리꼬미

피노키오의 네 주인공은 모두 수습기자입니다. 드라마에서 워낙 실감나게 수습기자의 모습을 잘 그려내, 저희 SBS 사건팀 기자들끼리는 킥킥대며 잘 보고 있습니다. 마치 저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요.

입사 후 본격적으로 기자 타이틀을 달기 전, 수습 신분의 6개월을 겪어야 합니다. (언론사 별로 다릅니다. 2~3개월 혹은 1년 가까이 하는 곳도 있습니다) 군대 다녀온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풀어내는 대한민국 남성들처럼, 기자에겐 수습(기자) 시절 겪었던 모진 에피소드를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들은 이야기만 종합해 보면, 대한민국 모든 기자들은 수습시절 무적의 슈퍼맨입니다. 의학계에서 들으면 기절초풍할 기록들도 많습니다. 일주일 동안 1분도 자지 않고 버텼다는 둥, 졸다가 택시에 치었는데 그래도 잠이 깨지 않아 도로에 누워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는 둥, 어떤 친구는 몇날 몇일을 자지 못해 힘들었는지, 수면 상태로 걸어다니다 잠에서 깨 보니 뜬금없이 인천공항 로비 앞에 서 있더랍니다. (제 동기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이 나라를 떠나 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씻지 않아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머리는 떡지고, 한 달 전에 입은 외투와 겉옷은 그대롭니다.(그나마 속옷은 갈아입고 있는지 본인만 알겠죠.) 한여름 수습을 보낸 기자들은 본인 몸에서 나는 악취 뿐만 아니라, 좁은 기자실에 다닥다닥 붙어 자는 타사 기자들 10여 명의 몸의 악취 또한 견뎌야 합니다. 한겨울엔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와 싸워야 합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현장에서 벌벌 떨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수습시절 겨울에 대한 기억은 매섭고 또 매섭습니다.

선배들은 내리 불가능한 미션을 선사하며 후배의 한계를 테스트합니다. (ex: 반성문 A4 120장 분량을 한 시간 내로 작성해 회사 팩스로 보내라, 서울 목동에서 포천 화재현장까지 30분 내로 이동해라, 지구대 30곳을 2시간 만에 돌아라, 지하 창고에서 탄환이 발견됐다는 수원에 사는 김 모 씨 집을 찾아오너라/단서는 집주인이 김 씨라는 사실 뿐/etc...) 그런데 신기한 건 그걸 또 수습기자들이 다 해낸다는 거죠. 기자들의 영웅담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스스로가 기특한 건지, 불가능한 미션을 내린 선배들이 미운 건지, 어떤 이야기들은 구전되는 동안 더해지고 더해져,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게 과장되기도 합니다.

이런 '놀라운'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바로 '하리꼬미'에서 비롯됩니다. 하리꼬미는 잠을 자지 않고 버티는 일종의 훈련인데요, 수습기자들은 2시간에 한번 씩 자신이 속한 라인(앞서 1편에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 1편 보러 가기)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사고들을 선배에게 전화로 보고해야 합니다. 하리꼬미의 원래 뜻은 한 장소에 붙박이처럼 눌러앉는, 우리 말로 바꾼다면 '뻗치기'정도 된다고 합니다. 라인에서 벗어나지 않고 실시간으로 발생을 보고한다는 뜻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데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잠을 잘 수 없을까? 답부터 말씀드리면 다 조금씩, 알아서, 잡니다. 단지, 공식적으로 잠을 자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데요, 2시간에 한번씩 보고를 해야 하니 적어도 연속 2시간은 잘 수 없는 셈이 되는 거죠. 게다가 선배와 통화할 때마다 정말 사소한 무엇이라도 보고할 거리가 있어야 하니, 잠을 자면서도 몸과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피노키오에서 인하(박신혜)와 유래(이유비)가 인하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형사가 된 찬수(이주승)에게 군것질 거리를 가져다 주며 "단순 교통사고라도 좋으니 하나만"이라며 매달리는 장면이 바로 이겁니다.
피노키오

면피성이라도 좋으니 라인에서 최근 벌어진 사건사고를 알려달라고 조르는 겁니다. 실제로 기자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경찰서 형사들마다 이런 수습들이 귀찮아 아예 두꺼운 유리문을 닫아두기도 하는데요, "형님! 한 번만요, 아무거나 하나 알려주세요"라는 외쳐봐도 "바쁩니다, 아니 왜 여기 와서 이러세요? 다른 경찰서 가 봐요!"라는 답을 듣기 일쑤입니다. 업무로 바쁜 형사님들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나야 하는 기자들의 줄다리기인 셈인데요, 기자들 입장에선 이런 시간을 통해 경찰서 전체의 업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또 배우기도 하니 감사하고 죄송한 일입니다.

경찰서에 가면, 형사과만 취재할 게 아닙니다. 같은 형사과라도 강력팀, 수사과(경제팀, 지능범죄수사팀, 사이버범죄수사팀)나 여청과(아동청소년계,성폭력전담팀), 정보과와 보안과까지, 각 팀에서 인지하고 수사하고 있는 사건들도 취재해 보고해야 하는데요, 이걸 '마와리를 돈다'라고 표현합니다. 쉽게 말해, 경찰서 내 각 부서, 팀을 샅샅이 들러 취재한다는 뜻인데요, 마와리는 경찰서만 도는 것이 아닙니다. 라인 내 지법, 지검, 병원, 학교 등을 부지런히 다니며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취재합니다. 발로 뛰어 직접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마와리 교육의 목표인 셈이죠.

수습기자 교육에 대해 지적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잠을 전혀 재우지 않는다거나, 심한 욕설과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과연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를 두고 내부적으로도 말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습이 끝난 후배들에게까지도 폭력적인 언행을 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수습 교육에 대한 뿌리깊은 관행이 영향을 미친 겁니다. 합리적인 대화 대신 일방적인 명령, 지시를 내리고, 그것을 군말없이 따르게 하는 방식의 소통이 선배의 권위이고 특권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약자일 수 밖에 없는 후배들에게 불합리한 힘을 행사하거나 패널티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느 직종보다 '인권'을 비롯해 우리 사회가 지켜내야 할 가치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회적 감수성을 지녀야 할 기자들에게 도를 지나친 훈련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리고 그런 훈련이, 후배 기자들에게 진정한 가르침이 될 수 있을까요?

기자가 다른 직종보다 체력적으로 고되고 정신적으로 무장해야 하는 직업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써내는 기사가 상식적인 세상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기자들이 속한 조직 내 문화부터, 세상 사람들이 용인할 수 있는 정상적인 범위 내에 있어야겠죠. 모두가 동의하는 수위의 훈련과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한데요, 이건 기자 사회 전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 [취재파일] '피노키오'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취재파일] 피노키오 가이드북 ② 취재원과 내부고발자, 그리고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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