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0일. 그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그날 그 남자를 쫓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내 인생은 달라졌다.
동대문에 있는 조그만 통닭집에 데리고 일하던 민씨와 마주 앉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가게가 소란스러웠다. 술에 취했는지 한 남성이 고성에 욕을 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오른 민씨가 나서면서 싸움이 됐다. 말로 시작된 싸움이 몸싸움으로 커졌다. 그리고 결국 그 남성은 민씨를 맥주잔으로 내리쳤다. 민씨는 피범벅이 됐고, 남성은 도망갔다.
아무 생각 없이 가게를 뛰어나왔다. 무조건 저 놈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건물코너를 돌아가는 순간, 누군가 내 뒤에 있었다. 그리고 뭔가가 내 머리 뒤에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경찰, 경찰을 불러주세요”
병원이다. 아내와 딸이 옆에 있다. 울고만 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꼼짝하지 않는다. 무섭다. 두려움이 몰려온다. 아내의 눈물은 끝없이 흐른다. 9살 된 내 소중한 딸도 엄마를 붙잡고 울고만 있다. 후회스럽다. 통닭집으로 들어가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을 뿐이다. 무슨 일이 나에게 벌어진 걸까. 경찰서에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병원이다. 13년째 병원만 32번째 옮겼다. 걸을 수가 없다. 휠체어에 앉아 있다. 매시간 알 수 없는 통증이 나를 덮친다.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없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아내는 없다. 아내는 견디다 못해 결국 떠났다. 잡을 수도 없었다. 딸도 나를 곧 떠날 것만 같다. 며칠에 한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하는 전화 통화가 그나마 나에게는 위안이다.
“아빠야”
“응”
“밥은 먹었어?”
“응”
“아픈데는 없고?”
“없어”
“......”
“끊어”
“어... ”
아직도 딸의 어릴 때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산호수공원에서 “아빠”라고 부르며 내 손을 잡고 즐거워하던 딸의 모습이 딸과 따듯했던 마지막 추억이다. 그 추억으로 13년을 버텼다. 언젠가 딸이 다시 따듯하게 내 손을 다시 잡아줄 것만 같다. 그 희망이라도 없으면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욕심이라는 걸 안다. 나 때문에 딸은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돈 한 푼 벌지도 못하고 병원에만 누워 있는 아빠, 아픈 엄마, 갈수록 끝없이 궁핍해지는 집안 경제 사정, 한창 사춘기 시절 딸은 나를 너무 미워했다. 내 딸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 때문이다.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냥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나? 난 그냥 일만 하며 살았다. 작지만 실내 인테리어 하청 일을 하며 가족과 함께 살아왔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게 잘못인가? 동료를 폭행하고 도망가는 사람을 잡으려한 게 잘못인가? 나에게 주어진 역경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대체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대체 내가 왜....
걷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시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매시간 찾아오는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딸이 잘 되기만 단 그것만 바란다. 딸이 살면서 ‘행복’을 느끼고 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빠로서 해준 게 하나도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지만, 그래도 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란다.
* 김승용씨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했습니다. 화자의 심리는 김동기씨와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감정과 내용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취재팀이 만난 김승용씨에게는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단 한순간의 상해사고로 장애인이 됐습니다. 김씨의 진단서 내용입니다.
경추부 척수손상에의한 사지마비로 독립보행이 불가능하고 일상생활동작의 상당부분에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며 현재 입원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재활치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첨부돼 있습니다.
김씨는 가장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버지입니다. 가족들에게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전과 9범의 폭력에 한 남성이, 한 여성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보호 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희생됐습니다. 한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가장은 아직도 끈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아파하고 아쉬워하며 한숨만 쉴 뿐입니다.
딸이 성인이 되면서 딸에게 짐이 될 거 같아 더 걱정입니다. 김씨는 정부에서 생계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양가족인 딸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씨가 정부에서 지원받는 것은 병원비와 주거급여 2만 원이 전부입니다.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딸에게는 기회가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도움도 필요하겠지만, 딸이 제대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자신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우리사회가 보듬어줘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전문가들의 능력기부가 필요합니다. 의료비지원과 생계지원도 좋지만, 아버지와 딸의 관계 회복을 위한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부와 나눔은 꼭 지갑을 열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나누는 것도 기부입니다. 김승용씨가 딸을 생각하며 눈물 대신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희망내일 프로젝트 '눈사람' 기부하러 가기
▶ 희망내일 프로젝트 '눈사람' 더 많은 기사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