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책장을 넘겨야 합니다." 젊고 패기만만한 45살 정치인의 사자후에 많은 미국인들, 특히 젊은 층이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권 도전 선언을 지켜본 민주당 원로들 중에는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2004년에야 연방상원의원이 된(물론, 아프리칸-아메리칸 정치인으로서는 그 것만도 대단한 기록이죠.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세 번째 흑인 상원의원입니다.) 말 잘하는 정치인이 덜컥 대통령직에 도전한다는 게 마땅치 않았던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런 지적과 우려에 대한 오바마의 대답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측을 당황케 했습니다. 1992년 미국 대선 때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부시 대통령을 향해 얘기했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겁니다. 바로 '세대교체'(Generational Change)입니다. 자신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출마하는 것이 아니라 낡고 부패하고 분열적인 워싱턴의 정치를 바꾸고, 새로운 세대와 함께 미국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한 거죠. 따라서 자신이 도전한 2008년 대통령 선거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선거일 수밖에 없다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워싱턴의 아웃사이더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면서, 클린턴은 15년이나 낡은 워싱턴의 정치를 지배해왔던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영부인으로서, 선배 상원의원으로서 국정 경험을 강조해온 힐러리 클린턴 측으로서는 졸지에 경험이 많다는 점이 약점이 돼버린 거죠.
그리고 무모해 보이기만 했던 그의 도전은 마침내 미국 역사상 첫 흑인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시대정신이 오바마를 도운 것이지만, 젊다는 이유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가 도전을 꺼렸다면 새로운 역사를 만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첫 대통령 취임식날 워싱턴 DC의 메모리얼 파크를 가득 채웠던 인파들이 저마다 "역사를 목격했다"는 뱃지를 달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이런 세대교체론은 검은 케네디로 불리는 오바마 이전에 42살의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잘 생긴 40대 초반의 백인정치인이 흑백 TV 화면속에서 '프론티어' 정신을 강조할 때 미국인들은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을 예감하며 열광했습니다.
젊은 정치인들의 도전은 미국에만 있던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도 이미 40년전에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맞서기 위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일입니다. 그 때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 의원이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회생시키자"며 '40대 기수론(旗手論)'을 외치며 가장 먼저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에 도전했습니다. "앞으로의 정치는 원로들이 아닌 40대의 젊은 세대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그 때까지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독립투쟁을 했거나 대한민국 건국기에 정치를 시작했던 원로들이 맡아왔습니다. 여기에 같은 40대인 김대중, 이철승 의원이 가세하면서 40대 기수론이 대세가 됐습니다.
유진산 당시 신민당 당수가 "입에서 아직 젖냄새가 난다"며 어리다고 폄하했던 이들이 대세를 형성하면서 그 경선은 오로지 40대 후보 세 사람만의 대결로 치러졌습니다. 압도적이었던 김영삼 후보가 방심의 결과로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역전당했던 경선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글을 전개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오바마도, 양김씨도 무모한 도전에 나섰을 때 모두 야당 소속이었습니다. 지금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새로운 지도부를 뽑기 위한 전당대회를 한 달 조금 넘게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문재인·박지원·정세균 세 거물급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는 양상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비판에도 이들에게 도전할 무모한, 그러나 적확한 정신을 가진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이제는 586이 된 386세대의 이인영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고, 새정치연합의 아웃사이더로 불리는 비슷한 또래의 조경태 의원 역시 출마를 선언했지만 반향이 아직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보다 나이가 많은 올해 57살인 김부겸 전 의원의 출마를 기대하는 시선들이 많은데, 아직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변화와 교체를 주장하며 야당 지지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낼 무모하면서도 담대한 도전자가 새정치연합에는 정녕 없는 걸까요? 아님 다음 대통령 후보 경선때는 나타날까요? 이 질문은 여당인 새누리당에도,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에 던져도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