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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소리 없는 감원 칼바람…희망 없는 '희망 퇴직'

국내 최대기업의 임원이던 대학 선배에게 연말 안부전화를 하다가 당황스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달 초 30년 가까이 다닌 회사로부터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퇴사' 통고를 듣고 보니 하늘이 깜깜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선배는 그래도 임원 생활을 몇년동안 했고, 자식 교육을 마친 상태여서 '먹고 살' 걱정은 없다고 말하며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하더군요. "당장 뭘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내가 한 게 어딘데. 회사가 야속하게는 느껴지더라고."
 
언론이나 인터넷에서는 조용한 듯 하지만 대기업을 중심으로 인적 구조조정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 구조조정과 다른 점이라면 정말 '조용하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올해 초 380명을 감원한 한화생명은 또다시 수백명을 감원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한화생명 직원들에게 '감원'이나 '구조조정'은 금기시된 단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구태여 모르는 척 할 정도입니다. 

이 회사 한 간부의  말입니다. "우리 회사 단계로는 희망퇴직을 원하는 사람들을 추렸고, 지금 심사하는 중입니다. 친한 직원 중에 벌써 그만두고 집에 가 있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다른 일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700명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500명 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좋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용히 열심히 일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300대 상장 기업에서 올 9월까지 퇴직한 사람이 2만 7천800명을 넘었습니다. 10월부터 12월까지 퇴직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3만명은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조용하면서 정말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감원 열풍'입니다.

기업들이 왜 올들어 갑자기 이렇게 인적 구조조정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요?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국경총 김동욱 본부장의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업 여건이 안 좋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약진하면서 우리 기업에 위협이 되고 있고, 러시아 디폴트 얘기가 나오고 있고,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이 자국 이익을 위해 환율을 조정하고, 이런 부분들이 결국은 기업 입장에서도 내년도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고, 중장기적으로 전망을 어둡게 보게 하거든요"

전경련의 한 인사는 이런 외부적 환경이 좋지 않은 것에 더해 '인적 자원'에 대한 기업들의 생각이 변한 것도 한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IMF 때 돈을 받기 위해선 IMF의 조건을 따라야 했어요. 인원 구조조정이었죠. 그 때 많이 내보냈는데, 문제는 그 뒤 회복기였습니다. 98년, 99년 경기가 회복하는데 막상 쓸만한 인적 자원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 뒤엔
사람 자르는 일은 신중하게 하자, 이런 분위기였어요. 2008년도 금융위기 때도 인적 구조조정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불황이나 저성장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기업들이 하기 시작한 겁니다. 저성장이 장기화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당연히 사람을 내보낼 것을 염두에 두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노동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최근 인원감축에는 더 중요한 요인이 하나 있다고 지적합니다. 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의 말입니다. "2016년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정년 60세가 의무화 됩니다. 이 의무화를 앞두고 기업이 사전에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근로기준법 23조, 24조에 따라 정리해고는 상당히 엄격하게 다뤄집니다. 그러나 직원 스스로가 선택하는 '희망퇴직'은 비교적 자유롭게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감원이 대부분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정말 희망해서 퇴직하는 걸까요?

지난 6월 인수합병으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했던 ING생명에선 직원 2명이 면담 도중 실신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남성 직원은 8차례에 걸쳐 '면담'을 통해 퇴직을 종용받다 스트레스로 쓰러졌습니다. 여성 직원은 3번째 '퇴직 면담' 도중 실신했는데 임신 중이었습니다. 이 회사 직원들은 '면담'을 꼭 찍어서 나가라는 말을 하는 '퇴직 종용 통보', 즉 '찍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과정이 있다고 해도 '희망퇴직서'에 서명만 하면 희망퇴직이 되는 겁니다. 이 밖에도 부서 퇴출이나 부당한 지방근무 명령 등 '희망퇴직서'에 서명을 받기 위한 방법은 다양합니다. 괴롭히는 방법도 다양하겠죠.

물론 희망할 만큼 좋은 대우와 조건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취재 도중 만난 대부분의 퇴직자들은 이런 조건을 접할 기회도 없이 직장에서 몰려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오면 바로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김종진 연구원의 말 다시 들어보시죠. 

"주요 선진국은 기업에서 잘려도 나가서 실업급여의 기간이 우리보다 2~3배 깁니다. 실업급여 금액 자체도 적어도 직전 소득의 70~80%를 보장받습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바로 취업을 알선해 주는 안전망도 튼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가게 되면 실업급여 기간도 짧고 소득도 최저임금 수준밖에 안됩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 뿐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결국은 직장에서 해고 대상자나 구조조정 대상자로 정한다는 것은 '살인' 하고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업이 감원을 서두르는 만큼 잘려나가는 사람은 '준비'할 기간이 짧아집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너무도 '조용'하게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방식입니다. 전경련 간부의 말입니다. "제가 아는 기업들도 지금 많이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데, 제가 전화해서 물어보면 어떻게 아셨냐고 오히려 물어봐요. 소문 좀 내지 말라면서요. 이게 기업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이렇게 은밀하게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노동 실태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실태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면 노동 시장에 대한 구조적 개혁이 불가능합니다. 실제 지난 19일로 예정됐던 노사정위원회의 '노동시장 구조개혁 방안' 발표는 이견을 좁히기도 전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는 사이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일단은 혼자서 모든 부담을 져야 합니다. 먹고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취재도중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멍한'상태로 퇴직 초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후에 '생계'를 위해 기술을 배우거나 자격증을 따는 일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이 분들을 취재하면서 공통점을 느꼈습니다. 전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리고 지금 자신은 만족스럽다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한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길래 이런 모습이 정형화될 정도가 됐을까.

한 은행 퇴직자는 구직활동을 위해 찍은 새 명함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꿈꾸는 자, 준비된 자만이 이룰 수 있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끊임없이 노력하고 준비하면 퇴직자, 그리고 퇴직 대상자들이 모두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하다고 답하는 직장인이 많은 사회가 된다면 이 겨울 추위가 지금보다는 훨씬 덜 춥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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