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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인사'에 시달리는 中 판사…의법치국 멀고도 험한 길

[월드리포트] '인사'에 시달리는 中 판사…의법치국 멀고도 험한 길
의법치국
지금 중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사자성어는 '의법치국'입니다. 올해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행사였던 제18기 4중전회의 의제였습니다.'법에 의해 나라를 다스린다.' 당연한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 말은 대단히 복잡하고도 민감한 함의를 갖습니다.

과거 국민윤리 교육을 받으신 분은 들어보셨겠죠. 공산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한다. 공산화 혁명을 완수할 때까지 무산 계급이 정치적 독재를 한다는 뜻입니다. 말이 무산 계급이지 결국은 공산당이 독재를 해야 하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합니다.중국 역시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인 만큼 이 이념이 적용됩니다. 중국 공산당이 정부와 군을 물론 사회 전체를 영도합니다. 사실상 초법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의법치국'을 강조하면 앞서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논리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중국 공산당도 법 테두리 안에서 권한을 행사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의 권능과 역할이 대폭 축소될 소지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법치'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됩니다. 실제 '법치'를 놓고 격렬한 이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법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서구 정치사상을 퍼뜨려 '중국식 특색 사회주의'를 오염시키려는 의도로 공격 받기도 합니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시진핑 주석이 '의법치국'을 들고 나온 것은 나름 혁명적 발상입니다. 물론 중국 공산당의 지배력이 대폭 약화되도록 운용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제약은 불가피합니다.사실 시진핑 정권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영국의 저명한 법 철학자 액튼 경의 명언입니다. 법을 넘어서는 권한을 지닌 중국 공산당도 피해갈 수 없는 명제였습니다. 부패 문제가 중국 인민들의 용인 한도를 넘어섰다는 위기감이 시진핑 정권을 옥죄고 있습니다. 공산당에도 법이라는 관리와 감독 틀이 주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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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사법 분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사법 기관, 특히 법원의 지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3권 분립 원칙을 견지하는 국가들과 사뭇 다릅니다. 우리의 경우 사법부는 행정부나 기타 어떤 기관과도 분리돼 독립적으로 예산과 인사, 운용을 합니다.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각급 법원들은 그에 해당하는 공산당의 관리, 감독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현 규모의 초급 인민법원은 그 현의 공산당 서기로부터, 시의 중급 인민법원은 그 시 당서기의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공산당이 사법 기관 역시 영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법 위에 관시(인맥)'가 통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법원에 입김을 가할 수 있는 통로가 여럿 있으니까요.

다음의 사건 역시 이런 부조리를 그대로 노정하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원래는 개인 간 빚을 둘러싼 단순한 법정 다툼이었습니다. 허난성 뤄허시에 사는 청모 씨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저우모 씨로부터 돈을 빌려 쓰다 1백55만 위안, 우리 돈 약 2억8천만 원의 빚이 쌓였습니다. 둘은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지를 놓고 협상을 벌여 합의서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청씨는 30만 위안만 갚고 1백25만 위안은 상환을 계속 미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법정 다툼을 벌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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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뤄허시 옌청구 초급 인민법원은 1심에서 1백25만 위안과 그에 해당하는 이자를 다 갚으라고 판결했습니다.청 씨는 이에 대해 상급 법원에 항소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은 뤄허시 중급 인민법원 민사1청의 부청장 천홍민 판사에게 배당됐습니다.

올  5월 천 판사는 2심 판결을 내놨습니다. 청 씨가 저우 씨에게 원금과 이자 합해서 96만3천5백 위안만 갚으라는 주문이었습니다. 합의서 내용상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연히 저우 씨가 발끈했습니다. 우리 돈으로 5천4백만 원 가까이 돌려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죠. 허난성 고급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아울러 유관 기관에 천 판사가 재판을 왜곡했다며 신고했습니다.

현지 언론이 천 판사를 상대로 이 재판에 대한 취재에 나섰습니다. 언론이 보기에도 판결 내용이 석연치 않아 보였나봅니다. 2014년 9월 초 취재 기자를 만난 천 판사는 '판결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재판 때문에 얼마나 시달리고 힘들었는지'를 털어놨습니다. 해당 보도에 나온 천 판사의 발언입니다.

"피고인측인 청 씨가 허난성 위원회 고급 간부의 친척이었습니다. 해당 간부는 각종 인맥을 총동원해 다자오후(중국어로 인사라는 뜻, 하지만 재판에 이런저런 간섭을 하는 행위를 지칭하기도 함)를 했습니다. '잘 살펴봐 달라'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말도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 판사 정말 고약하다'고 비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고생이 극심했습니다."

 문제의 보도가 난 뒤 뤄허시 중급 인민법원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허난성 전체가 술렁였습니다. 급기야 최근 법원 측이 관용 인터넷 공보 사이트를 통해 입장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체 조사 결과 천 판사는 공식 취재 뒤 기자와 가진 사적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사실무근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법원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우리 법원은 인민법원 종사자 처분 조례 제 106조 규정에 따라 천 판사에 대해 심각한 중과실 사실을 기록한 뒤 인민대표회에 천 판사의 면직을 신청할 것입니다. 아울러 판사 직위도 박탈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천 판사가 취중에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했고 그로 인해 법원의 명예와 권위가 실추된 만큼 천 판사를 중징계 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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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터넷 댓글을 보니 법원의 이런 발표를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들은 없어 보입니다. 대부분 이런 내용입니다.

"취중에 무슨 거짓말을 꾸며내나. 취중진담인 게지."
"당 간부의 재판 간섭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없는 척 하면 얼굴 뜨겁지 않나."
"법원이 이렇게 발끈하고 나서는 게 오히려 더 진상을 설명하고 있다." 등등.

일반인들이 괜한 오해를 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 중국 행정학원 법학부의 런진 교수가 '의법치국'과 관련해 사법체계 개혁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중국 고위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의 교수가 공식석상에서 한 말을 그대로 옮겨보죠.

"사법 종사자들의 행동 양태가 전혀 정당하지 못합니다. 사건 처리에서 청렴하지 못합니다. 돈을 받아먹고 관시를 따집니다. 개인의 안면을 봐주는 등의 행위를 합니다. 심지어 원고의 돈도 받아먹고 피고 돈도 받아먹습니다."

중국의 사법 기관은 이렇게 공식적인 비난을 받을 만큼 문란해진 상태입니다. 그러니 중국 인민들이 천 판사의 고백을 믿고 법원의 조사 결과를 외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천 판사의 토로가 현실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진핑 주석은 '의법치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사법 체계도 전면 개혁하겠다고 합니다. 각급 법원을 최고인민법원 산하로 재조직해 중립성과 독립성을 높이도록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 판사의 사례를 보면 참 멀고도 험할 것이라 짐작됩니다. 사법 기관에 대한, 특히 기관을 구성하는 주체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제도만 바꿔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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