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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21일'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다

[SBS 뉴스토리 - 영화 '목숨', 허락된 생의 끝을 기록하다]

"지금 마음껏 사랑하세요"
중앙대 영화학과 교수인 이창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큐 영화 '목숨'이 연말 극장가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말기 암환자들의 마지막 일상을 있는 그대로 필름에 담은 영화입니다.

경기도 포천의 한 호스피스 병원이 영화의 배경입니다. 수녀원 땅에 지은 호스피스 병동엔 15개 병상이 있습니다. 취재진이 찾은 12월 초엔 말기암 환자 7명이 입원해 있었습니다. 이 곳에 입원한 환자들이 머무는 시간은 평균 21일. 정말 생의 마지막 3주를 보내는 곳이고, 영화 주인공들은 지난해 가을부터 올 초까지 이 곳에서 마지막을 정리했습니다.

● 두 아이의 엄마 김정자 씨
김씨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남편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40대 주부입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뒤 재기하려 노력하는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도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여생을 보낼 소중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집을 사고 한달만에 말기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집들이도 하지 못하고 호스피스에 들어와야 했습니다. 호스피스에 들어와서야 남편의 간호를 받으며 따뜻한 남편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남편이 떠주는 밥도 먹고, 남편의 키스도 받고, 남편의 눈물도 봤습니다.

간이 침대에 실려 뒤늦은 집들이를 한 뒤 그녀는 호스피스로 돌아와 숨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따뜻한 사랑을 마음껏 느꼈습니다. 남편은 집들이 때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백년 가약을 했는데 백년이 안 갔네. 여보 사랑해. 당신 고생만 시키고..." 남편의 쏟아지는 눈물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달랬습니다. "아니야"

● 아직도 하고픈게 많았던 75세 박진우 할아버지
박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을 했습니다. 무서운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말 안듣는 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렸다는 그의 말에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은 '정말요?' 라며 웃음으로 믿어줍니다. 아직 싸인, 코싸인 공식을 외우고 어려운 수학문제를 내기도 하고 병원 식구들이 난감해하면 직접 풀기도 합니다.

박 할아버지는 하고싶은 것도 많습니다. 올 초 자장면이 먹고 싶어 병원 식구와 병원을 나섰던 할아버지. 어렵게 찾은 중국집이 문을 닫은 것을 보고는 "동네가 아주 촌 동네야" 라는 우스개 한마디를 남깁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도 감추지 않습니다. 박 할아버지에게 자장면은 그냥 자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간절히 알려주고 싶었던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마지막 생일 잔치를 했습니다. 소중한 순간이기에 그의 열정은 어느 때보다 더했습니다. 결국 며칠 뒤 임종실로 옮겨졌고…. 

그의 부인은 그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았습니다. "고맙고 사랑해요. 그동안 잘 참고 견디셨어요. 너무 아파하는 것을 함께 나누지 못해서 미안해요. 잘 참아준 것 고맙고, 이제 좋은 곳으로 가서 아픔 다 잊고 훨훨 날아가세요"

● 남겨진 가족이 걱정이었던 40대 가장 박수명 씨
박씨는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40대에 요절하신 어머니 뒤를 자신이 그대로 따라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호스피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의 가장 큰 걱정은 16살 아들이었습니다. 부인과 딸은 걱정이 덜 됐지만 아들 녀석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생각에, 자신이 죽는다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4명….단란한 가족사진을 제대로 찍고 싶었습니다. 호스피스를 나와 살던 집을 찾았습니다. 병원 가족들 도움을 받아 아들과 함께 멋진 양복을 마련했고, 부인과 딸은 하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멋진 아빠, 건강한 아빠'로 남고 싶었습니다. 환하게 웃었습니다.

부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냥 당신에게 한마디도 안했지만 혹시라도 살 수 있다면 식물인간이 돼도 좋으니까 내 곁에만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한마디에 그는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말기암엔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고, 결국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찍고 있는 영화 감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암이라는 무서운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줬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을 줬습니다. 내가 암에 안 걸렸더라면, 내가 건강했더라면 몰랐을 소중한 가치들을 암에 걸려서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암은 저한테 또다른 선물을 준 겁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이창재 감독은 박수명씨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1년 넘게 준비하고 제작하는 새 그들과 친구가 돼 버렸다고 합니다. 특히 연배가 비슷한 박수명씨와는 너무 깊이 사귀어 버려서 그의 임종을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예고돼 있다면 너무나 큰 아픔이지만, 또 중요한 것들을 챙겨보고 마무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 생명의 의미,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죽을 권리,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가족과 이웃을 마음껏 한없이 사랑하라'는 뜻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이창재 감독은 말합니다.

또 죽음을 슬퍼하지만은 말라고 권합니다. 영화를 보면 생의 마지막까지도 삶의 희노애락이 모두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숨쉬고 있는 하루하루는 너무도 소중합니다. 

[12월 9일 방송 'SBS 뉴스토리'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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