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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새 미국 국방장관, 이론물리학자 출신 '국방통'

카터 새 미국 국방장관, 이론물리학자 출신 '국방통'
5일(현지시간) 새 국방장관에 지명된 애슈턴 카터(60)는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아이비리그 학자에서 '국방통(通)'으로 변신한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카터 지명자는 1954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해군 신경전문의였던 윌리엄 카터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일대를 수석 졸업한 카터는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건너가 1979년 이론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뉴욕 록펠러 대학과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박사후 과정(포닥·post-doc)을 밟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과학·국제관계 센터 국장을 맡았다.

학자의 길을 걷던 카터는 1993년 민주당 정권인 빌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인생의 경로를 수정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레스 아스핀,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 밑에서 국제안보정책 담당 차관보를 맡아 예상치 못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당시 중대 현안이었던 북핵 문제와 소련 해체후 대량살상무기(WMD) 해체 문제를 매끄럽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카터 지명 사실을 발표하면서 "WMD 해체 프로그램을 개발한 혁신가"라고 언급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수조 달러의 예산이 투입되는 핵 위협감축 협력 프로그램(CTR)인 '넌-루거(Nunn-Lugar) 프로그램을 실제로 기획하고 이행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핵무기를 소리소문없이 해체하고 카자흐스탄의 고농축 우라늄 600㎏을 은밀히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1차 북핵위기가 고조됐을 당시에는 북한 영변 핵시설을 겨냥한 군사작전 계획을 준비하면서 한반도 문제와 첫 인연을 맺었다.

제네바합의로 이어진 북·미 직접대화 과정에서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을 동결하는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핵확산금지조약(NPT),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핵태세 검토보고서(NPR), 대테러 이니셔티브 등 비확산·군축업무도 직접 관장했다.

차관보직을 물러난 1997년 이후에도 카터는 국방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페리 전 장관이 미국의 대표적 포용정책인 '페리 프로스세스'를 입안하는 과정에 '2인자'로서 참여했다.

당시 카터는 페리 전장관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대북 포용정책의 방향을 직접 설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에는 필립 젤리코 버지니아대 교수, 존 더치 전 국방차관과 함께 '포린 어페어스'에 공동으로 기고한 글에서 9·11 테러를 '예언'하는 듯한 글을 썼다.

그는 "재앙적 테러 행위는 미국 역사의 분수령과 같은 사건이 될 것"이라며 "전례 없는 인명과 자산의 손실을 주고 미국이 안전하다는 근본적 인식을 허물어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화당 정권인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국방분야에 계속 머물렀다.

9·11 테러 직후에는 국가과학아카데미위원으로서 국토보안부 창설을 자문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국제안보자문위원회 멤버로 활동했고 상원 외교위원회 정책자문그룹 공동의장을 맡기도 했다.

공화당이 카터 지명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인사"라며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때의 활동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방부 두뇌집단인 미트리 코퍼레이션의 상임이사를 지냈고 민간회사인 글로벌파트너스 테크놀로지의 선임 파트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와 비영리 기술자문회사인 미트레틱 시스템즈에 국제관계와 안보문제 상담역도 했다.

2009년 민주당 정권인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카터는 본격적으로 '날개'를 달았다.

2009년 4월 빌 게이츠 국방장관 아래에서 획득·기술·병참 담당 차관을 맡아 펜타곤의 군수조달과 기술업무를 총괄했다.

이어 리언 패네타 국방장관 시절인 2011년 10월 부장관으로 승진해 국방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학자 출신답지 않게 연간 6천억 달러의 예산과 240만 명의 국방인력을 관리하는데 상당한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의 대표적 대외정책 의제인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초석을 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3년 1월 집권2기 출범을 앞두고 국방장관 후보로 유력히 떠올랐으나 오바마 대통령은 결국 공화당 상원의원 출신의 척 헤이글을 '낙점'했다.

이후 카터와 헤이글 장관은 줄곧 편치 않은 관계를 보였다는게 워싱턴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기본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달랐던 탓에 정책 조율과정에서 종종 드러나지 않는 갈등을 겪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카터의 '친구'들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참모들과 헤이글 장관 사이에도 상당한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터는 결국 작년말 특별한 이유없이 사임했으나 불과 1년만에 국방수장으로 되돌아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6일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번 인선때 카터를 지나치고 헤이글을 기용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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