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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법안 내용 몰라서" "읽어 볼 시간 없어서", 여당 의원 기권 이유 들어보니…

예산안 시한 내 처리 성과…숙제 남긴 국회선진화법

[취재파일] "법안 내용 몰라서" "읽어 볼 시간 없어서", 여당 의원 기권 이유 들어보니…
누리과정 예산 문제 등 여야 갈등 끝에 2015년 예산안은 헌법 시한인 12월 2일 자정을 2시간 정도 남기고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예산안이 헌법 시한을 넘기지 않고 제 때 처리된 게 12년 만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2012년 도입된 개정 국회법,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입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제한하고, 쟁점 법안은 과반이 아닌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가결되도록 하며, 11월 30일까지 예산안이 예결특위를 통과하지 않으면 다음날인 12월 1일 국회 본회의에 자동부의 되도록 하는 게 국회 선진화법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국회선진화법은 한가지 과제를 남겼습니다. 본회의에 예산안과 함께 자동 부의된 예산부수법안의 경우 상임위 심사를 건너뛰어 국회의 법안심사권이 무력화되는 허점을 보인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일 본회의 표결에서 발생했습니다.

기획재정부가 발의한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은 가업상속 공제 혜택을 받는 기업의 범위를 연매출 3천억 원 이하에서 연매출 5천억 원 이하로 확대하는 게 핵심입니다. 창업주가 사망했을 때 상속세로 인해 회사를 분할 매각하거나 지분을 매각해 경영권이 넘어가는 사례가 생기자, 중소기업들이 상속세 부담을 완화시켜달라고 요구해 도입된 법안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손톱 및 가시 뽑기 대책의 일환으로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중점 추진 법안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2일 본회의에서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 수정안과 정부 원안 모두 부결됐습니다. 여야 원내대표가 해당 법안은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의외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에서 반대와 기권 표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당대표를 지낸 교육 부총리 황우여 의원과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교사 출신 이한구 의원 등7명이 반대했고, 28명이 기권표를 던져 새누리당에서만 35명이 사실상 '항명' 표를 던졌습니다.
이한구 연합

이한구 의원은 SBS와 통화에서 "가업 상속 혜택 법은 개정한 지 1년 밖에 안 돼 효과가 어떤지 검증도 안하고 확대하면 안 된다. 그야 말로 부자 감세"라고 말했습니다. 또 "기업한테 잘해주는 것과 대주주에게 잘해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며 고용 창출 등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기업을 돕는 게 중요하지 대주주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의원처럼 법안의 문제점을 숙고해 소신 투표를 한 경우도 있지만, 취재 결과 법안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생략된 채 덜컥 본회의에 상정되다 보니 법안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거나,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하지 않은 채 표결에 나선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한 여당 재선 의원은 "법안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했고, 법안 설명을 제대로 못 들어 어떤 내용인지 가늠할 수 없어 기권했다"고 털어놨고, 다른 여당 의원은 "지도부에서 합의를 했는데, 사실 의원들이 내용을 잘 몰랐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데, 중간에 자세히 읽어볼 시간이 사실 없었다"고 실토했습니다.

또 부결에는 새정치민주연합 김관영 의원의 반대토론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 의원은 본회의장에 직접 준비한 프리젠테이션 자료까지 틀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부작용이 많은 법"임을 설득했습니다. 정부 원안이 통과할 경우 "새롭게 276개의 기업이 기업당 최대 250억원, 모두 합하면 장래 약 6조 원 상당의 상속세를 최대 안내게 되는 것"이라고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반면 새누리당은 예산안 처리가 1분이라도 빨리 돼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토론조차 하지 않았다가 법안 부결이라는 후폭풍을 맞았습니다.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예산안 자동부의 조항이 처음 적용됐고, 덕분에 국민은 여야가 다투지 않고 헌법이 정한 시한 안에 예산안이 통과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상증세법 파문처럼, 예산안과 함께 제대로 심사되지 않은 법안이 덜컥 본회의에 상정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번엔 반대토론과 법안을 잘 모르는 의원들의 기권으로 본회의 문턱에서 걸러질 수 있었지만, 심사가 제대로 안된 법안이 얼마든지 본회의를 통과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새누리당은, 쟁점법안 통과에 재적의원 5분의 3이 찬성하도록 한 조항이 식물 국회를 만들고 있다며 국회 선진화법을 손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쳐야 할 국회 선진화법이라면, 이번 상증세법 파문에서 나타난 허점도 함께 손봐야 할 걸로 보입니다. 예산 처리 시한 준수라는 헌법 가치가 최우선이라 하더라도, 국회 본연의 임무인 법안심사에 손을 놓는 것도 국회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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