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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오리엔트 특급살인 사건과 '난방 투사'

난방비 '0원' 수사결과는 "혐의 없음"

[취재파일] 오리엔트 특급살인 사건과 '난방 투사'
●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달리는 열차 특실에 있던 60대 미국인이 밤 사이 살해됐다. 이 객실칸에 있던 승객 11명과 승무원 1명이 용의자로 지목됐다. 그 외 다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증언이나 정황에 따르면 모두 알리바이가 있다. 살해당한 시신은 있는데 살인자는 없다!? 범인은 누구인가.

저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 <오리엔트 특급살인 사건>의 간단 줄거리다. 에르퀼 푸아로는 소설 말미에 사건 관계자를 죄다 모아놓고 두 가지 추리 결과를 들려준다. 첫번째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외부 침입자가 범인이라는 것. 두번째는 용의자 모두가 범인이라는 것.

뜬금없이 크리스티 여사의 걸작을 언급한 건, 워낙 유명하고 또 좋아하는 작품이라서다. 또 다음에 거론하는 사건과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김부선 국감 참석

● '난방 투사'…수사 결과는?

배우 김부선씨에게 '난방 투사'라는 별칭까지 붙여줬던 '성동구 아파트 난방비 비리 의혹' 사건의 수사 결과가 나왔다. 수사 결과 아파트 관리소장 3명이 일부 세대에 난방비를 제대로 부과하지 않은 혐의로(업무상 배임) 불구속 입건됐다. 그리고는?...아무도 없다.

이 문제가 알려지게 된 계기부터 다소 흥미롭다. 김부선씨가 지난 9월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민과 말다툼하다 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 여기까지는 그저 유명 연예인에 대한 가십이었다. 그런데 말다툼하게 된 이유가 난방비 문제였다는 게 드러나면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 아파트에 겨울 난방비를 한 푼도 내지 않은 세대가 많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관심은 증폭됐다. 한국의 아파트 거주비율은 거의 50%에 육박하기에 그런 관심은 자연스러웠다.

이미 서울시와 성동구청 실태조사도 진행된 뒤였다. 이 아파트 전체 536세대에, 2007년~2013년 동절기(12, 1, 2, 3월)에 부과된 난방비 14,472건 중에서 난방량 '0'으로 나온 게 300건(2.1%), 9만 원 이하는 2,398건(16.5%)라는 내용이었다. 전체 평균 난방비는 18만 원 정도, 6분의 1 정도는 평균의 절반도 안되게 난방비를 냈고 6분의 5는 그만큼 더 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한 결과였다.

성동구청은 이 내용을 관할인 성동경찰서에 통보했고 경찰은 내사에 착수했다. 


● 경찰 "의심스런 건 11세대"

경찰은 난방비가 평균보다 훨씬 적게 부과된 2,398건을 모두 조사하게 되면 전체의 77%인 410세대가 조사 대상이 된다며 기준을 설정했다. 그 기간 난방량 '0'이 2회 이상 나온 세대로 한정했는데 그러니까 69세대로 줄었다. 난방량 '0' 300건 중에 241건이 해당했다.

410세대에서 69세대로 줄어든 건데, 이중에 11세대는 공소시효가 완성돼 다시 제외됐다. 난방비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면 사기나 횡령 정도에 해당할텐데 둘다 공소시효는 7년이다. 이 11세대는 2007년 1~3월분이 해당해 이미 7년이 지났다는 거다. 또 24세대는 그 기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게 소명됐고 18세대는 열량계가 고장났거나 배터리가 방전돼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다. 5세대는 난방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됐다고 경찰은 설명했다.(남향이라 겨울에도 굳이 난방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58세대가 용의 선상에서 제쳐졌다. 남은 건 11세대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경찰은 이 11세대가 의도적으로 열량계를 조작해 난방량을 '0'으로 만들어 난방비를 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중 4세대는 관리비를 매월 자동이체하면서 구체적인 내역은 보지 않아 왜 '0'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4세대는 난방을 아껴 썼다고 진술했다. 나머지는 난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장기간 집을 비웠다, 열량계가 고장났다고 주장했지만 객관적인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이들 11세대가 난방량 '0'이 나와 내지 않은 난방비 총액은 5백만 원 정도로 추산됐다. 

 
● "하지만 입증할 순 없다"

그러나 경찰은 이렇게 의심은 가지만 '의도적 조작'을 입증할 순 없었다고 밝혔다. 이 아파트에 설치된 열량계 자체는 기술기준이 강화되기 이전 제품이라 배터리를 빼거나 온도센서가 손상되면 정상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경찰이 전문기관에 의뢰해 받은 감정 결과다. 즉, 난방량 '0'으로 조작하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열량계에 부착된 봉인지가 뜯겨져 있었다고 해서 정말로 조작했는지 단정할 수도 없고,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조작이 의심되는 세대 구성원 여러 명 중에 누가 조작했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고 설명했다.
 
정리하면, 경찰은 536세대 중에서 수사의뢰를 받은 410세대를 놓고 수사 편의상 69세대로 대상을 한정한 뒤, 이중에 타당한 이유가 있거나 형사 입건이 불가능한 58세대를 제외하고 11세대를 의도적 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봤는데 구체적인 행위자를 특정할 수 없어 형사 입건은 못했다. 

성동구의 그 아파트 난방비 비리 의혹은 이렇게 "관리소장 3명 입건, 주민들 일부가 '의도적 조작'을 한 정황은 있으나 형사 처벌은 못한다" 정도로 마무리됐다.  성동구청에 관련 자료가 통보됐지만 구청에서는 앞으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는 선 이상은 못할 듯하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 "우리 아파트는 조작이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었다. 내 난방비는 제대로 부과되고 있는지, 혹시 누군가 덜 내는 걸 대신 내주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경찰 수사 결과에도 저 아파트의 11세대에만 문제가 있었구나(그것도 형사 처벌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문제를 제기했던 김부선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남겼다.

"...성동경찰서는 과학수사 한다고 어디가서 자랑하지 마십시요. 동대표와 관리소장 유착관계, 국정조사라도 해야 하나요? 현, 선관위원장 전, 동대표 회장 수년간 난방비 안냈습니다. 전,동대표들 난방비 안낸 가구들 꽤 됩니다. 사실 너무 많습니다. 현 동 대표들 납득할수 없는 난방비 내는 사람들 아직도 몇몇 있습니다. 왜 관리소장 셋만 처벌합니까? 정작 주범은 따로 있고 그 주범이 누군지는 모두가 아는데 경찰만 모르시나 봅니다. 유감 입니다. 유감..."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진범을, 푸와로가 굳이 밝히지 않은 건, 실정법에는 어긋나더라도 그게 정의엔 더 부합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경찰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경찰서 1곳에서 할 수 있는 수사의 한계는 분명하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는 보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이번 난방비 비리 의혹에서는 어떤 게 더 정의에 부합하는 것일까. 

11월 19일, 서울 YMCA가 주관하는 "일명 김부선 법 제정 시급하다!"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예정돼 있다. '공동주택 관리 투명화와 주민참여 방안 모색'이 주제다. 김부선씨도 사례 발표하고, 입법이 가능한 여야 의원도 토론자로 나선다. '난방투사'의 고군분투가 헛되지 않으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 입법이 제대로 진행돼야 할 것 같다. 이번에 난방비 때문에 술렁였던 사람들 만큼이나 나도 한 명의 아파트 거주자로써 매달 관리비를 흔쾌히 낼 수 있길 또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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