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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시진핑의 ‘파란’ 거짓말 그리고 ‘APEC블루’

[취재파일] 시진핑의 ‘파란’ 거짓말 그리고 ‘APEC블루’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고 하지요. 곧 드러날 ‘새빨간’ 거짓말도 있고 남을 해하려는 ‘검은’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선의에서 나온 ‘하얀’ 거짓말이 있습니다. ‘파란’ 거짓말은 자기 과시나 허풍, 허세에서 비롯된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APEC이란 대규모 국제행사를 무사히 잘 치러낸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 주석이 ‘파란’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이징 APEC정상회의에 모인 21개국 정상들에게 호스트인 시진핑 주석은 베이징의 파란 하늘을 과시하면서 APEC이 끝난 뒤에도 파란 하늘을 계속 볼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중국 언론들은 앞다퉈 ‘APEC 블루’를 가능하게 한 중국 정부와 시 주석의 영도력을 칭송하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APEC이 'Air Pollution Eternally Controlled(공기오염이 영원히 잡혔다)'의 약어라는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얘기가 중국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APEC블루

베이징 하늘은 오늘도 쪽빛입니다. 지난 달만 해도 지독한 스모그로 감히 들숨 한 번 하기 어려웠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APEC과 함께 찾아온 파란 가을 하늘을 즐기며 맘껏 전력 호흡을 즐기고 있습니다. APEC행사가 마무리된 지도 사흘이나 지났건만 PM2.5 수치는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길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APEC 전에 비해 많이 늘었습니다. 웬만큼 지독한 스모그 아니면 좀처럼 마스크를 쓰는 법이 없는 중국 사람들이 무슨 연유로 이렇게 편히 숨 쉴 수 있는 날에 거추장스런 마스크를 꺼내 들었을까요?

APEC블루

답은 간단했습니다. 이들이 쓴 마스크는 스모그 차단용이 아닌 감기 방어용이었던 겁니다. APEC기간 중에 베이징에 갑자기 감기 환자가 늘었던 겁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감기 환자가 무려 10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물론 요즘이 한참 일교차가 큰 환절기는 맞지만 이렇게 갑자기 감기 환자가 급증한 건 무엇 때문일까요?

APEC을 며칠 앞둔 지난주 초부터 APEC기간 내내 베이징은 물론 허베이성 일대에서는 난방이 금지됐습니다.(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북방지역의 난방은 공식적으로는 11월15일 시작이지만 사실상 그 보름 전부터 난방을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APEC컨벤션 센터가 있는 베이징 외곽의 옌치후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연기가 난다며 취사까지 금지당했다고 합니다. 마침 이 기간에 베이징에 출장 와 있던 동료 기자는 썰렁한 호텔 방에서 밤새 덜덜 떨었다며 푸념을 늘어 놨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감기 환자가 급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블루

APEC블루가 몰고 온 서민들의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차량 홀짝제 덕에 도로 위 차들은 분명히 줄었습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길을 막아 버리는, 즉 교통통제와 홀짝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유력 인사들의 반칙 운행 탓에 러시아워 교통체증과는 또 다른 짜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허베이성이나 산둥성 일대에 산재해 있는 유리공장이나 시멘트공장 등 수많은 굴뚝형 공장들은 이 기간 전면 조업이 중단됐습니다. 허베이성의 스좌장 같은 공업 도시에는 4백 개가 넘는 공장이 멈춰섰습니다. 매연 뿜던 공장 세운 거야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겠지만 그럼 그 공장에 다니던 수천, 수만 명의 농민공 노동자들은 어찌됐을까요? 안 그래도 빠듯한 주머니 사정인데 근 보름간 일을 못하다보니 밀린 집세며 생활비에 애들 학비에 막막한 지경입니다.

영세한 공장 근근이 운영해오던 공장주들도 손해가 막심합니다. 정부에서 이 사람들에게 지원금을 제대로 지급했을 리 없습니다. 농민공노동자들 역시 유급휴가는 꿈도 못 꿀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해 주범이라는 오명 때문에 어디 마땅히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처지입니다. 이렇게 ‘APEC블루’의 그늘에 가려진 크고 작은 고통들은 고스란히 힘없는 서민들에게 전가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APEC을 다시 정의해야겠습니다. Air Pollution Excruciatingly Controlled(공기오염이 고통스럽게 잡혔다), Air Pollution Embitteredly Controlled(공기오염이 사람들의 원성속에 잡혔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스모그가 잡힌 것은 정부의 훌륭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서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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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다시 공장과 아파트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를 것이고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은 배기가스를 뿜어낼 것입니다. 6년 전 ‘올림픽블루’처럼 이번 'APEC블루'도 일장춘몽으로 끝날지 모릅니다.

시 주석이 21개국 정상들을 모아놓고 호기좋게 ‘파란’ 거짓말을 쏟아내는 대신 묵묵히 희생을 감내해 준 라오바이싱(老百姓)들에게 공을 돌리고 그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을 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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