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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내 권력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복수 위해 정전 유발

[월드리포트] "내 권력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복수 위해 정전 유발
취재 현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취재를 방해하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바쁜데 시간을 끌어 보도가 불가능해질 때 주로 그렇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욱하고 치솟습니다. '기자가 우스워? 기자의 무서움을 보여줘?'

제 수양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래서 원칙을 하나 정해놨습니다. 앞서 말한 객기를 부리고 싶어지면 취재를 그만 둡니다. 나아가 해당자나 해당 기관에 대해서는 당분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정 해야 할 취재라면 동료에게 부탁합니다.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어 편견과 악의를 갖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복하고 싶다는 부적절한 동기가 작용할까 우려해서입니다.

사람은 '완장'을 차면 쥐꼬리 같은 권력이라도 휘두르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호모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라 그러한 가 봅니다.

최근 중국의 한 지방 소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지역 전력 공급사의 간부가 갈등을 빚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휘둘러 복수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이달 2일 오후 허난성 허비시 근교 치현에서 이 지역 전력공급분소 소장인 양모씨가 직원 5명과 함께 시내 중심가의 KTV를 찾았습니다. 중국의 KTV란 노래를 부르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유흥업소로 우리의 노래방과 단란주점을 합쳐놓은 형태입니다. 휴일을 이용해 직원들과 단합을 도모했나봅니다. 대낮부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습니다. 1시간 만에 양주 여러 병과 수십 병의 맥주를 비웠습니다.

그러고도 술이 모자라 또 양주와 맥주를 주문했습니다. 아울러 안주를 '서비스', 즉 공짜로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업소 측은 거절했습니다. 안주를 원하면 돈 내고 시키라고 했습니다. 낮술에 얼큰하게 취해있던 양 소장은 그만 대노했습니다. 이성을 잃고 객실의 집기들을 마구 깨부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공짜로 못줘? 너희들에게 전기회사 라오후(老虎, 호랑이)의 무서움을 알게 해주겠어!" 라오후, 중국어로 호랑이는 권력자를 상징합니다. "전기를 끊어주지. 너희들에게 전기 공급을 중단하겠어. 돈을 벌 수 있을지 두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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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소장의 지시를 받은 한 직원이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당직자에게 명령했습니다. "남환로 일대 전력선에 문제가 발생해 수리가 필요하니 지금 즉시 전기를 끊어." 10분 후 정말로 일대 전력이 끊겼습니다. 남환로 뿐아니라 북환로 등 현의 중심가 상가와 건물에 정전이 발생했습니다. 전기가 다시 들어온 것은 무려 6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관할 파출소와 전기회사의 전화기는 놀라고 화난 일대 주민들의 전화로 불이 났습니다. 경찰이 즉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국가 전력망 허비시 지사는 물론 상급의 허난성 지사까지 자초지종 파악에 나섰습니다. 술값 시비로 일어난 전기회사 간부의 보복극임이 드러나면서 지역 사회는 또 한 번 발칵 뒤집혔습니다. 전기회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비등했습니다.

결국 양 소장은 직위해제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 중앙에 중징계가 상정됐습니다. 6개월 치 성과급을 압류 당했습니다. 나머지 직원 6명도 모두 크고 작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형사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중국 언론들은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전력 공급의 관리, 감독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 지에 경악했습니다. 어떻게 술에 취한 소장의 전화 한 통에 전력이 끊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중국의 '전력공급 관련법'에는 전력 공급 중단이나 제한에 대해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와 규정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전력망의 고장이나 점검, 돌발적인 사고가 발생해서 전력을 끊어야 할 경우 먼저 상부 기관에 보고해서 허락을 얻어야 합니다. 아울러 정전이 되는 지역의 전력 소비자들에게 사전에 시간과 장소, 이유를 고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전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응급상황에 대해 대책을 미리 세워 지역 정부에 비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양 소장은 이런 모든 절차와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았는데도 정전을 유발할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관련 법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았거나 무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이런 돌발적인 상황을 제어하고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정전된 지 6시간이 지나도록 상급 기관이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할 만큼 모니터 체계가 허술했다는 점도 지적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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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있습니다. 중국 공직자의 사고방식입니다. 스스로를 공공 서비스의 제공자가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는 관리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양 소장의 경우 어떤 일이 있어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서비스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력을 공급해주는 것이 시혜이며 자신의 권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라오후, 권력자'라고 부르죠.

최근 인민일보는 사설을 통해 중국의 공직자에 대해 쓴 소리를 했습니다. 시장 경제가 도입되면서 공직자들에게 잘못된 관념이 들어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권한을 교환 가치가 있는 상품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을 하면서 촌지를 받고, 막아야 할 일을 눈감아주면서 뇌물을 받는다고 꼬집었습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양 소장 역시 자신의 권한을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에 치졸한 보복극에 동원할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모두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 기관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장에서 거래할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상품과 서비스를 공공기관이 맡아서 취급합니다. 그러니 중국 공직자들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도입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공적인 권한을 '내 것'이라 여기는 착각은 중국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숱하게 봅니다. 중국의 양 소장처럼 노골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좀 더 은밀하고 세련되게 휘두릅니다. '공공 서비스'적 성격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라오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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