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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경찰서장이 왜 돈 봉투를 돌렸을까?

갈등을 조정하는 어떤 방식

- 밀양, 외지인에겐 동명의 영화로도 한때 이름을 알렸지만 최근 몇년간은 달랐다. 포털 사이트에서 '밀양'을 검색하면 자동으로 함께 뜨는 게 '송전탑'이다. 이제는 밀양 하면 송전탑이다.

'밀양 송전탑' 공사 문제는 2008년부터 본격화했는데 준공을 앞둔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2008년 8월 착공 이후 공사 중단과 재개가 열 번 넘게 반복됐고 한전과 반대 주민, 이를 둘러싼 정부와 사회단체들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이 문제로 2012년과 2013년엔 일흔이 넘은 주민 두 명이 각각 분신과 음독이란 방식을 선택해 자살했다. 2014년 6월 11일,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에 대한 강제 철거가 있었다.

처음엔 고압 송전탑의 유해성 여부가 논란의 중심이었던 것 같다. 이미 송전탑이 건설됐거나 고압선이 지나는 주변 주민들에게서 집단 암이나 백내장 등이 발병하고 있다는 주장 등이 제기됐다. 한전은 이에 대해 루머에 불과하며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좀 지나서는 정부의 전력 공급 체계와 에너지 정책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 송전탑 건설이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주장, 원전 문제까지로 논란은 번져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송전탑 공사는 지난 9월 사실상 마무리됐고 11월에는 가선 작업까지 끝난다.

- '청도 송전탑' 문제도 있다. 한전이 청도에 계획한 송전탑 40기 중 39기의 건립은 끝났지만 마지막 1기를 놓고 삼평1리 주민들이 강력 반대해왔다. 주민들은 송전선의 지중화를 요구하며 2012년부터 농성해왔고 한전은 공사를 중단한 채 협상을 진행하다 지난 7월 주민과 시민단체 반발을 물리치고 2년 만에 공사를 재개했다. 이 역시 공사는 거의 마무리됐다.

이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불거진 게 '주민 매수 의혹' 혹은 '돈 봉투 살포' 사건이다.
청도경찰서장이 돌린
- 먼저 청도에서 의혹이 제기됐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청도군 삼평1리 반대 주민들에게 난데없는 봉투가 전달됐다. 봉투를 가져온 건 청도경찰서 정보계장, 봉투엔 서장 이름이 적혀 있었다. 5만원짜리로 백만 원도 들었고 많게는 5백만 원도 들어 있었다. 모두 1,700만원이었다.

여러 모로 이상했다. 돈 봉투를 마련한 게 과연 경찰이 맞는지가 궁금했다. 경찰이 주민에게 돈을? 적혀있는 대로 서장 지시로 봉투를 돌린 거라면 왜 송전탑 반대 주민 7명에게 봉투를 준 것인지, 적지 않은 돈인데 돈의 출처는 어디인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공사 지연 때문에 계속 애를 먹고 주민들과 협상하고 있던 한국전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곧바로 떠올랐다. 파문이 확산되자, 경찰청에서 즉시 감찰에 나섰고, 고발까지 이어지면서 수사에도 나섰다.

- 밀양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본격 의혹이 제기된 건 9월이지만, 앞서 지난 2월 한전이 밀양의 한 마을 이장을 통해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에게 천만 원을 건네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송전탑 반대 대책위가 고발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청도 돈 봉투는 9월 12일, 밀양 매수 의혹은 9월 17일에 각각 경찰이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도 사건의 전말이 먼저 확인됐다.

- 경찰청의 수사 결과는 이러했다.
심영구 취재파일
청도경찰서장이 "한전· 반대주민 간 갈등 해소를 위해" 한전에 주민위로금을 요구했고 이에 한전에서 건넨 1700만원을 봉투에 나눠 담아 주민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좀더 자세히는 "시위 중 다친 주민들이나 강성 주민들에게 치료비·위로금을 지급하면 대치 상황이 해소될 것으로 생각하고"다. 굵은 글씨는 경찰 보도자료에 담긴 내용 그대로다.)

 자신의 이름을 적은 건, 한전에서 준 돈이라고 하면 주민들이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게 서장의 진술이었다고 한다. 이때 서장이 한전에게 여러 차례 돈을 내놓으라고 강하게 요구했는데 이런 강요는, 서장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직권 남용 혐의를 적용했다는 경찰청 설명이다. 여기에 지난 8월 한전으로부터 100만 원을 받은 것도 드러나 뇌물 수수 혐의가 추가됐다.

즉, 돈 봉투를 마련한 건 경찰이 맞았다. 다만 한전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반대 주민에게 봉투를 돌린 건 갈등 해소를 위해서였고, 돈의 출처는 한전이었다.

- 한전(대구경북지사)은 어디서 돈을 마련했을까? 여기서 실제 공사를 하는 시공업체 S사가 등장한다. 한전 지사는 경찰서장의 강요를 받고는 "자신들은 공기업이라 따로 비자금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S사에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S사에서는 먼저 600만원을 가져왔고, 그 다음에 한전 지사에서 요구했을 때는 추석 연휴라 입금이 늦어졌다.

그러자 한전 지사장이 자기 계좌에서 천 백만원을 꺼내 경찰에 줬는데 이 돈은 S사에서 보전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사실상 S사 제공으로 볼 수 있다. 즉, 한전 지사는 S사 돈을 받아 경찰에 건넨 것이다.(굵은 글씨는 경찰 설명이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한전 지사장을 비롯해 직원 10명은 2009년부터 최근까지 S사로부터 명절 떡값, 휴가비 등으로 3천 3백만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S사는 매월 가짜 직원 20명에게 급여를 주는 것처럼 꾸며 천만원에서 2천만원씩 비자금을 조성해왔고 이렇게 13억 9천만 원의 비자금을 마련했다는 게 확인됐다. S사는 이 돈으로 한전의 요구에 응했다. 떡값도 줬다.

'청도 돈 봉투'에 대한 경찰 수사는 이렇게 정리됐다. 청도경찰서장은 직권 남용 및 뇌물 수수 혐의, 한전 대구경북지사장 등 10명은 뇌물 수수 및 공여, S사 대표 등 3명은 업무상 횡령 및 뇌물 공여 혐의로 14명을 불구속 입건해 송치, 끝.

-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먼저 서장은 왜 그랬을까?

수사를 진행한 경찰의 설명은 이렇다. 이 서장의 고향이 경북 청도였다. 2005년에 총경 승진해 총경만 10년째,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아 사실상 승진에 대한 욕심도 접었다. 고향에서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 충돌 때문에 노인들이 다치기도 하고 많이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중재하고픈 생각에 저런 일까지 하게 된 것 같다.

이 설명처럼 어떤 사리사욕 때문에 청도서장이 돈을 요구했고 봉투를 돌린 것 같지는 않다. 서장에게 뇌물 수수 혐의까지 적용되긴 했지만 서장은 100만원을 받아 이중 90만원으로 복숭아를 사 직원과 기동대원 등에게 돌린 것으로 확인됐다. (남은 10만원으로는 회식을 한 모양이다...) 경찰이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더 있을 순 있겠으나 적어도 수사 결과만으로는 이렇다.

그러나 서장의 판단은 여러모로 어리석었다. 치안 책임자이자, 공직자로서, 돈을 줘서 어떻게든 무마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다. 돈을 한전에 마련하라고 했다는 것도 그렇다. 발상과 수단에 큰 하자가 있었고 결과는 더 큰 문제였다.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리라는 기대 정도를 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로 인한 파장은 고려하지 못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그로 인해 정년을 앞두고 아예 불명예 퇴진할지도 모를 지경에 처하게 됐다. 

한전도 그렇다. 청도서장이 여러 차례 강요해서 한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응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처음에는 찬성 주민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선례를 남기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거절했으나, 관할 경찰서장이 압박 수위를 높이자 어쩔 수 없이 돈을 전달한 것으로 판단하여..."

관할 서장을 무시할 수 없는 건 맞는 말이겠으나 달리 보면 수많은 총경 중 한 명, 일개 서장일 따름이다. 서장이 계속 강요해 어쩔 수 없었다? 설명부터 명쾌하지 않다. 또 한전은 치졸하게도 '을'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겼다. 서장이 돈을 요구할 때마다 시공업체에 손을 벌렸다.

지사장은 심지어 자기 계좌에서 돈을 꺼내 주고는 그 돈을 보전해주겠다는 약속을 시공업체에 받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떡값, 휴가비 조로 뇌물을 받아왔다. 시공업체가 수년간 조성해왔다는 비자금 13억 원은 이런 용도로 준비된 돈이었다.

밀양 사건은 어떨까. 청도 사건은 경찰서장이 주도하고 돈 봉투라는 물증이 명확하게 나왔다는 점 등이 더해져 오히려 결과가 빨리 나왔으나 밀양 사건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 수사가 지지부진하다.


밀양 송전탑 반대

- 밀양이나 청도나 송전탑 건설은 거의 끝났고 마무리 작업만 남은 상태이나,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11월 11일부터 2박 3일 동안 상경 투쟁을 진행한다. 상경 투쟁 보도자료에는 이렇게 나왔다.

"...언론과 시민사회에 밀양 및 청도의 끝나지 않은 과제를 각인하고, 돈봉투 매수 사건, 공사 시 자행된 경찰의 인권 유린, 에너지 3대 악법 개정 등의 과제를 위해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활동"을 하겠다고 한다.

어떤 사회나 이해 관계는 엇갈리고 의견은 달라 충돌할 수 있기에 갈등이 있다. 그런 갈등을 어떤 과정을 거쳐 해결하는지, 또 완전히 해결은 못하더라도 양측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 타협의 지점을 마련해 갈 수 있는지가 제대로 소통하는 사회를 재는 척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여러 사건 중에 '돈봉투 살포'만 놓고 봐도 우리 사회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나 공권력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밀양 및 청도의 끝나지 않은 과제"라는 말에 다른 의미에서도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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