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월드리포트] 청소년 영웅이 사기꾼으로 추락한 이유는?

[월드리포트] 청소년 영웅이 사기꾼으로 추락한 이유는?
신데렐라는 꼭 동화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도 분명히 있습니다. 로또로 대변되는 어마어마한 돈 벼락, 갑작스런 신분 상승, 상상하지 못했던 유명세 등등. 우리는 종종 인생 역전을 목격합니다.

신데렐라를 우리는 부러워합니다. 질투도 합니다. '나도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없나' 백일몽도 꿔봅니다. 하지만 인생역전은 진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일까요? 신데렐라만 되면 우리는 무조건 행복해질까요?

레이추넨은 2008년 원촨 대지진이라는 대 참극이 낳은 신데렐라였습니다. 미증유의 끔찍한 자연재해 속에 우리를 감동시키는 한줄기 눈물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한줄기 따뜻한 바람이었습니다. 레이추넨의 영웅담은 이렇습니다. (그가 직접 밝힌 부분과 친구들이 증언한 내용을 종합했습니다.)

2008년 5월12일 중학교 3학년생인 레이는 학교에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 갑자기 다리가 풀리면서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대지진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정신없이 학교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운동장에는 벌써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몰려나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담임인 전 선생님과 급우 여러 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빠져나오지 못했나보다.'

레이는 망설임 없이 2층의 교실로 뛰어올라갔습니다. 2층에 올라서는 순간 방금 뛰어오른 계단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교실 안에는 여학생 7명이 여기저기 쓰러진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겁내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복도 끝 계단으로 어서 뛰어가!"

다행히 건물 반대쪽 계단은 무사했습니다. 급우들을 도와 운동장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 순간 한 여학생이 외쳤습니다. "오우칭이 없어. 오우칭이 아직 안 나왔어." 레이는 다시 교실로 뛰어들었습니다.

오우칭은 교실 뒷문 부근에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넋이 거의 나간 상태였습니다. 레이는 오우를 부축했습니다. 도저히 반대쪽 계단까지 뛰어갈 수 없을 듯 했습니다. 부서진 계산에서 손을 늘어뜨려 오우를 무사히 아래층에 내려다줬습니다. 자신도 뛰어내리려는 순간, 건물이 극심하게 요동치더니 벽이 갈라지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반대편 복도 난간으로 뛰어넘어가 건물 앞에 서있는 나무를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레이는 다행히 나뭇가지를 잡았고 무사히 땅에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학교 건물은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레이는 그렇게 친구 7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소년영웅1
레이의 영웅적인 행동은 입소문을 타고 퍼졌습니다. 지역 신문 기자가 처음 기사를 썼습니다. 중국의 거의 모든 매체 기자가 레이의 학교로 몰려드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CC TV는 무려 15분짜리 프로그램으로 레이의 의협심을 소개했습니다. 레이는 언변도 좋아 당시 긴박했던 순간, 솟구치는 용기와 대담함을 생생하게 말했습니다. 일약 소년영웅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2008년 6월 레이는 중국 대지진의 구조 영웅 37명 가운데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됐습니다. 여름에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지정됐습니다.  전국구 유명인이 됐습니다.

레이는 성적이 그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청두에서도 가장 유명한 명문고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은 면제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월 4만 원 정도의 용돈도 지급됐습니다. 레이가 학교 공부를 무난히 따라갈 수 있도록 모든 선생님들이 특별대우를 해줬습니다. 레이는 사상 가장 행복한 고등학생이었던 셈입니다.

소년영웅1
하지만 레이의 삶이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입니다. 레이가 고등학교 시절 사귄 여자 친구 하오모 양의 증언입니다.

"어머니가 아파서 거의 하루 종일 간병해야 할 때 레이가 매일 병원으로 와줬어요. 그 따뜻함에 반해 사귀기 시작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귀면서 알게 된 레이는 듣던 것, 생각했던 것과 좀 달랐습니다. 우선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요령을 피우는데 매우 능숙했습니다.

나중에는 학교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어요. 항상 나이 많은 어른들과 어울려 다녔어요. 어디를 가나 영웅 대접을 받으니까 사람이 점점 허황돼졌어요. 허풍스러워지고 뭔가 항상 붕 떠 있었어요. 갈수록 손이 커졌습니다. 나중에는 돈을 엄청나게 써댔어요. 한 달에 최소 1백70만 원 이상씩 뿌려댔어요. 돈이 어디서 나느냐고 물으면 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어요.

여행도 좋아했어요. 함께 하이난의 휴양지 싼야에만 3 번, 베이징, 샤먼, 구에이린, 리장 등 유명한 여행지를 다녔어요. 가면 꼭 4성이나 5성급 호텔에만 묵었어요. 대형차를 빌려서 몰았고요. 게다가 항공기를 일반석으로 끊으면 매번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가 됐습니다.  "자신은 영웅이라 언제든지 업그레이드가 된다"고 말하더군요. 나중에는 도박에도 손을 댔습니다. 매일 밤 술집도 드나들었습니다. 술집에서 수십만 원씩 쓰기 일쑤였습니다. 레이의 부모는 매우 평범한 월급쟁이 직장인이었는데 말이죠."

레이의 주변 사람들은 레이가 점점 더 인맥, 즉 '관시'를 과시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아는 사람이 일을 맡겼다며 자신이 회사 채용, 청두의 명문고 입학 사정, 공공 관청의 행정에도 관여한다고 큰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호언장담은 사기 행각으로 이어졌습니다.

레이는 여자친구인 하오 양에게 항공기 승무원으로 취직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술집에서 항공사 사장의 아들을 알게 돼 자신의 말이면 취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소개비로 필요하다면서 10만 위안, 우리 돈 1천7백만 원을 받아갔습니다. 하지만 항공사 구인 공고가 나고 공모 절차가 진행되는데도 레이는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하오양이 따지면 감언이설로 변명하기 바빴습니다.

결국 이 일로 레이는 하오 양과 헤어졌습니다. 레이는 그 과정에서 하오 양의 어머니를 속여 노트북까지 가로챘습니다. "그 노트북에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자료가 많아요. 노트북  만이라도 꼭 찾았으면 좋겠어요." 하오 양이 눈물을 흘리면서 취재진에게 한 말입니다.

하오 양과 갈라선 레이는 청두에서 선전으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본격적인 사기 행각에 나섰습니다.

하오 양과 사귈 때 소개를 받아 알게 된 우모 부부가 다음 먹잇감이었습니다. 자신이 청두시 교육국에 아는 사람이 많다면서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 알선을 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소년 영웅의 아우라에 현혹된 우모 부부는 주변의 아는 사람들을 레이에게 소개시켜줬습니다. 이렇게 20여 명으로부터 약 2천만 원을 챙겼습니다. 우모 부부 역시 레이에게 천여만 원을 뜯겼습니다.

지역 교통경찰과 잘 알고 있다면서 운전면허증을 시험 없이 받게 해주겠다는 사기 행각도 벌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16명으로부터 2천5백만 원을 가로챘습니다.
소년영웅1
소년 영웅의 가면 속에 벌이던 사기 행각은 결국 파국을 맞았습니다. 레이는 지갑을 도난 당했다며 선전시 한 파출소에 신고했습니다. 레이를 상대로 조사를 벌이던 경찰은 레이 자신이 도피자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습니다.

레이의 각종 범죄 행각은 속속 드러났습니다. 청두와 선전에서 피해자가 몰려들었습니다. 왕년의 소년 영웅은 파렴치한 사기 범죄자가 돼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법률 전문가들은 레이의 경우 편취한 액수가 크고 수법이 좋지 않아 중형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입을 모읍니다. 아무리 낮춰 잡아도 징역 10년 이상이 예상된다고 말합니다. 올해 22살의 레이추녠에게 꽃 같은 20대가 사라진 셈입니다.

레이의 아버지는 경찰의 연락에 싸늘하게 반응했습니다. "외지에 나간 뒤에도 여러 차례 도와줬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뒤치다꺼리를 해줄 여력이 없습니다.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변호사 선임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수감 기간 동안 사식을 몇 차례 넣어줬다고 합니다.

레이가 소년 영웅의 칭호를 얻은 나이는 16살이었습니다. 아직 인격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고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한참 무르익어갈 시기였습니다. 그때 엄청난 명예와 관심, 유명세가 주어졌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라도 이겨내기 쉽지 않은 유혹들입니다. 하물며 아직 어린 청소년에게 영광의 잔은 독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이를 아꼈던 중학교 은사는 한탄합니다. "레이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도록 지도해줄 어른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레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허황된 바람과 허풍스러운 관념을 심어주는 사람만 수두룩했습니다. 우리는 한 계단, 한 계단씩 밟고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레이는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발판을 마련해주지 않자 추락한 것입니다."

남다른 대담함과 용기, 재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총명함, 과단성 등 레이추녠은 미덕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이런 소양들을 잘 키우며 차분히 성장했다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청년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데렐라가 된 것은 그에게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었습니다. 지나친 행운이 찾아왔을 때 파멸의 덫이 아닌지 고민하기에 그는 너무 어렸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