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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번에 네 순서 맞아?"…불편한 진실 '임신 순번제'

[취재파일] "이번에 네 순서 맞아?"…불편한 진실 '임신 순번제'

● 간호사 5명 중 1명 '임신순번제' 경험

'임신 순번제'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설마~~" 했었습니다. 임신을 순번을 정해서 한다는 말은 아닐테고, 그럼 무슨 뜻이지?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임신 순번제를 직접 경험한 간호사 분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순번제를 경험한 간호사의 수가 적어 만나기 어려웠던 게 아닙니다. 부당한 진실을 폭로할 용기(?)있는 분을 만나는 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현직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뉴스에 나와 진실을 말하고 난 후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할 지 걱정이 앞섰을 테니까요.

시내 공원에서 임신 순번제를 경험한 간호사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아니 믿기 싫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호사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저에게 솔직하게 전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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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연한 비밀 '임신순번제'

"순번제라고 해서 정말 위에서부터 너는 1번이다, 너는 2번이다 정해주는 건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나 이번에 낳을 건데 너는 다음 번에 낳았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요. 그래서 암묵적인 순서가 있는 거죠. 이번에는 누구, 다음에는 누구 이렇게요."

간호사들 사이에서 임신 순번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주로 수간호사가 "임신순서를 잘 정해서 무리 없도록 하라"는 암묵적 지시를 내리고 그러면 임신 계획 중인 간호사들은 눈치를 보며 서로 순번을 정해 시기를 조절하게 되는 겁니다.
 
"요즘 워낙 불임커플들도 많고 힘든 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임신하는 게 생각보다 쉽게 되는 게 아니다보니 솔직히 순서 기다리다가 앞에 번 사람이 1년 넘게 애를 못 가지고 이러다보면 계속 뒤에는 밀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불임이라서 시술하고 계속 이러고 다니는 사람한테 너 이번에도 안 됐니? 그럼 이번엔 내가 가질게 라고 얘기하기도 굉장히 미안한 거잖아요.

그러다가 겹치기도 하고 이런 경우가 생기거든요. 겹치거나 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람이 하나의 생명을 가졌다는 건 굉장히 축복해야될 일이고 어쨌든 최우선적으로 축하를 먼저 받아야될 일인데 부서장이나 위에서부터 대놓고 "너 네 순서 맞니? 굳이 이번에 낳아야 되겠니? 남한테 피해주는 건 생각 안 하고,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니?"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니 저희도 나름대로 배려하고 계획하고 이렇게 하다하다 안 되는 경우가 있는 건데 축하한다는 말 대신 대놓고 굳이 낳아야 되겠냐고 얘기하는 건 정말 낙태를 종용하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막상 임산부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받는 상처라든가 스트레스는 엄청난 거고 그러다보면 자기도 눈치보는 상황이니까 임산부가 좀 몸을 사려서 일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눈치보여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하다보면 유산이 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 거예요.

비정상적으로 임신한 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 애를 가진 건데도 심한 경우에는 눈치보여서 말도 못하고 남편한테 얘길 안 하고 몰래 가서 낙태를 하는 경우도 봤어요, 진짜. 친한 사람들끼리만 알고 있어요" 

어떤 수간호사는 "너 때문에 근무여건이 어려워 졌는데 어떡할 거냐?, 대책을 내 놓으라"며 임신한 간호사가 애기를 낳을 때까지 괴롭혔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회사에서 여름휴가 시기를 서로 의논해서 나눠 가듯이 임신과 분만휴가를 나눠서 가라고 압박을 주는 거랑 똑같다고 봐요. 그런데 애기를 만드는 일이 여행계획 짜는 것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한 번에 임신이 되면 좋겠지만 사람이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불임시술이나 이런 걸 하다 보면 1년이 걸릴 수가 있고, 2년이 걸릴 수도 있고 뒷사람은 그걸 2년, 3년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 야간근무 투입 위해 '자필 동의서'까지 작성

"임산부는 야간근무를 빼줘요. 법적으로 야간근무를 못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야간근무 하게 될 경우 '자필 동의서'를 쓰라고 해요. 인력 부족으로 인해 내가 원해서 야간근무를 한다는 자필 동의서인거죠. 

내가 임신해서 야간 근무를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일하는 사람들이 내가 할 몫까지 더 많이 해야 하니까 같은 부서에 임산부를 데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머지 사람들의 야간근무가 많아진다는 뜻이죠. 

그야말로 일은 힘든데 인력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부족한 상태에서 돌아가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휴가나 그런 게 보장이 되면 좋은데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임산부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이나 그런 게 법적으로 보장은 돼 있는데 실제로 저희가 휴가를 받는다거나 휴직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거든요. 인원이나 이런 게 워낙 안 돼 있다 보니까.그러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에요.

정부에서는 많이 낳아라, 낳아라 출산장려를 하고 그러는데 실제 임신하는 것부터가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최소한 임산부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다 보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도 마음적으로 서로 팍팍하게 상처주고 받고 그렇게 인식 자체가 삭막하게 돼 가는 게 더 힘든 거죠. 사실 일이 힘들어도 직장생활이 동료들끼리 서로 보듬어주고 그러면 힘들어도 견디고 보람도 느끼고 할 텐데 점점 서로 상처주고 그런 쪽으로 가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제일 안타까운 것 같아요."
 
● 정부는 '출산 장려'…현실은 '임신 자율권'마저 침해

가장 큰 문제는 인력부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건의료노조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54%가 "이직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직장생활하면서 나는 이 병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절반 이상인 셈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일한다면 어떻게 환자들한테 좋은 서비스가 나올 것이며 국민들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안전한 병원이 되겠습니까?
 
정부는 지금 저출산 시대를 맞아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온갖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모성보호가 가장 필요한 간호사들은 임신과 출산의 자율권마저 침해당하고 있었습니다.

분만휴직이나 육아휴직을 장려하고 있지만 병원은 이런 것들을 실제로 사용하지 못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겁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그림의 떡과 같은 정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정말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병원 인력이 OECD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 하고 있는 걸 감안할 때 충분한 인력의 충원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인력이 충원되고  모성보호같은 중요한 것들이 병원에서 살아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현실적인 정책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더 이상 '임신순번제'로 고통받는 임산부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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