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소리에게서 이런 스스럼 없는 고백이 나올 줄 몰랐다. 그 대상이 홍상수 감독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선 다소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소리는 명실상부한 홍상수의 '뮤즈'가 아닌가.
홍상수 감독이 한번 작업한 배우와 연이어 함께 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김의성, 김상경, 유준상, 이선균 등과 계속 해서 영화를 찍었고 문소리, 정유미, 정은채 등과도 연이어 작업해오고 있다.
문소리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단골 배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로 첫 인연을 맺은 뒤 '하하하'(2009), '다른 나라에서'(2011)를 거쳐 신작 '자유의 언덕'까지 최근 몇년간 홍상수 영화 세계안에서 가장 빛나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홍상수 감독의 열 여섯 번째 장편 영화인 '자유의 언덕'은 인생에 중요했던 한 여인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모리'(카세 료)가 서울에서 보낸 며칠을 다룬 작품. 문소리는 이 영화에서 모리가 서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여인 영선으로 분해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
영화 개봉 후 만난 문소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가내수공업'에 비유한 뒤 그의 특별한 작업 방식에 대해 전해줬다. 특유의 능변이 빛나는 인터뷰 속에서 감독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과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A. 언제나처럼 전화 오셔서 "시간 되냐"하길래 "됩니다"라고 말했고, "이번에 누구랑 해요?"라고 물었더니 "카세 료라는 배우랑 할꺼야"라고 해서 "어머! 좋아요!"라고 했다. 그렇게 캐스팅이 성사된거지.
Q. 홍상수 감독 영화는 일단 충무로 주류 영화와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
A.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특별출연 하면서 첫 인연을 맺었고 '하하하'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초저예산에 2주가 채 안 되는 짧은 촬영 기간, 대본은 당일 아침에 나오는 시스템이라 처음엔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Q. 심지어 무보수 아닌가? 요즘은 그나마 예전보다 상황이 나아졌다던데?
A. '하하하'때는 정말 기름값 정도만 주셨다. 뭐 그땐 나폴리 모텔(통영)에만 머물러 있었기에 돈 들일도 딱히 없었다. 이번에는 차비보다 좀 더 주셨다. 이것저것 다하면 100~200만원 정도? 감동적이더라.
Q. 아침에 대본이 나오는 시스템은 이제 좀 적응이 되나? 순발력 향상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첫 작업 때와 지금 작업은 적응 속도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을듯하다.
A. 아침에 대본을 주시면 약 한 시간 정도 준비할 시간을 주시고 바로 촬영에 들어간다. 즉각적으로 현장에 적응하고 대본을 숙지해야 한다. '하하하' 찍을 때는 그야말로 정신을 못차렸다. '다른 나라에서'나 '자유의 언덕'은 총 촬영 기간이 2주 였는데 경험이 쌓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더라. 촬영 당시에는 잘 모르는데 지나고 나면 쌓이고 남는 게 상당하더라.
A. 홍상수 감독님은 나에게 뭘 가르치려 한 적이 없는데 나는 굉장히 많이 배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촬영이 끝나고 나도 그 시간들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내가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굉장히 중요한 뭔가를 알게 된 느낌이 든달까. '하하하'를 찍고 나서 감독님이 "한 번 더 할래"라고 제안하셨는데 그때는 시스템 적응하는 데 워낙 애를 먹어서인지 선뜻 "네"라고 대답을 못했었다. 그래서 "감독님 자꾸 보면 지겨우니까 죽기 전에 한 번 정도만 더해요"라고 둘러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는 불러주시면 언제라도 하고 싶은 정도가 됐다.
Q. 원래 홍상수 감독 영화의 팬이었나?
A. 아니다. 나도 감독님과 작업하기 전까진 감독님의 영화를 안 좋아했더랬다.
Q. 홍상수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배우의 지적 호기심이나 연기 테크닉을 시험하게 하는 매력이 있을 것 같다.
A. 맞다. 감독님이 나의 어느 부분을 쓸지 몰라 늘 긴장하게 된다. 보통의 영화는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에 걸맞은 배우의 어떤 역량을 끌어쓰지 않나. 그러나 홍 감독님은 배우의 어떤 면을 쓰실지 모르기때문에 처음엔 좀 무서웠다. 말로는 "뭐라도 끌어쓰려면 쓰세요"라고 말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모자란지를 알게 된달까. 홍 감독님과의 촬영은 예측불가의 상황이 많다. 때문에 당시에는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남는 것들이 참 많다.
Q. 대본이 촬영 당일에 나오면 배우는 신을 이해하고 대사를 숙지하는데만 해도 시간이 촉발할 것이다. 현장에서 디렉팅을 할 때 감독님이 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설명해주시는 편인지?
A. 배우들에게 잘 설명을 안해준다. 우리가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면 감독님이 살짝 잡아주시는데 그때야 감독의 의도를 어렴풋히 느끼는 정도다. 오히려 촬영 외적인 공간에서 감독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 영화와 연관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이해하기 수월해지더라.
A. 거의 없다. 사실 애드리브를 생각할 시간의 여유도 없다. 대본이 나오면 그것만 숙지하기도 빡빡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감독님 영화는 한 신을 길게 찍고, 편집이 거의 없어서 신 안에서 리듬을 다 만들어야 한다. 애드리브가 들어갈 틈이 없다고 보면 된다.
Q. 신작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 영화 중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온도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동화 같았달까.
A. 나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이렇게 따뜻하게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처음보고 많이 울었다. 두 번째는 많이 웃었다. 어찌보면 별 이야기도 아니고, 특별한 설정도 없는 그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긴데 동화 같단 생각이 들더라. '하하하'때 감독님이 쓴 대사 중에 "좋은 것만 보고 살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보면서 그 대사가 생각나더라.
Q. 영화 속 이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될 거란 걸 촬영 때 알고 있었나?
A. 정확한 얘기는 못 들었다. 그런데 시나리오에서 편지가 흐트러지면서, 한 장을 잃어버린다는 설정이 있어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 정도는 했다. 어쨌든 우리는 순서대로 찍었다. 심지어 카세 료는 순서대로 편집한 것만 보고 일본으로 갔다. 또 우리는 1,2차 편집 때까지 영화 제목이 '자유의 언덕' 될지도 몰랐다.
Q. 일본 배우 카세 료와의 작업은 어땠나? 언어의 벽이 있음에도 굉장히 호흡이 잘 맞아 보였다.
A. 이름만 들었을 땐 '누구지?' 했었는데 작품을 찾아보니 그의 출연작중에 내가 봤던 영화가 꽤 있더라. 카세는 촬영하면서도 '정말 좋은 친구가 될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 예상보다 훨씬 친해졌다. 카세는 촬영하는 동안 몸과 마음 전부를 이 작품을 위해 내어놓고 뛰어들어줬다.
Q. 대사의 대부분이 영어라 연기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 같다. 카세 료와의 소통도 그렇고.
A. 촬영이 닥치니까 인간의 능력은 기대 이상으로 발휘되더라. 이젠 외국영화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본 미리만 주고 외울시간만 준다면. 하하. 그나마 영어 대사에 대한 부담이 덜했던건 홍 감독님이 원어민처럼 영어하는 걸 안 좋아하셨다. 그래서 내 말투를 최대한 반영한 편안한 영어 대사를 구사했다.
Q. 카세 료가 홍상수 감독의 팬이란건 널리 알려졌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을텐데 실제로 경험해본 홍상수 영화는 어땠다고 하던가?
A. 카세가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니 다른 모든 작업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고 하더라. 이를테면 영화를 찍는데 화장은 왜 하며, 옷은 왜 갈아입어야 하냐고 하더라. 홍 감독님 스타일에 너무 빨리 길들여졌더라. (웃음)
A. 맞다. 나와 카세, 김의성, 윤여정 선배님 모두 자기 옷을 입고 촬영했다. 촬영 전에 트렁크에 옷을 여러벌 들고 가서 감독님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촬영날 아침에 대본이 나오고 "3번 옷 가져오세요"라고 전화가 오면 싸가는 식이다.
Q. 모리와 영선은 다시 만나게 될까?
A. 그럴 것 같다. 두 사람의 인연이 그렇게 쉽게 끝날것 같지 않다. 다시 만나서 사랑을 이뤄야 한다는게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라 다시 만나도 좋을 것 같은 생각에 가깝다.
Q. '자유의 언덕'은 문소리에게 어떤 의미의 영화로 남게될까?
A. 내 필모그래피에서 '자유의 언덕'은 '박하사탕'과 나란히 하는 영화가 될 것 같다. 많은 분들이 '하하하' 이후로 내가 굉장히 달라졌다고 하시는데 '자유의 언덕'을 통해 배우의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싶다.
Q.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문소리에게 역시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인걸까?
A. 그렇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앞으로도 웬만하면 할 것 같다. 지금 내 바람은 감독님이 최근 몸이 많이 안좋아지셔서 건강을 되찾으셨으면 하는거다. 몸 때문에 술, 담배를 1년 넘게 끊으셨는데 어서 예전의 혈기를 되찾으셨으면 좋겠다.
Q. 올해 '관능의 법칙', '만신', '자유의 언덕'까지 그 어느 해보다 개봉작이 많았다. 편수도 편수지만, 다양한 색깔의 영화에서 각기 다른 캐릭터를 선보인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A. 개봉 시기가 올해 다 겹쳐서 그렇지 지난해에 찍은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지난 1월부터 9월까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연기가 하고 싶어도 작품이 없어서 살짝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앞서 찍어놓은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을 하더라.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올해처럼 돈 안되고 바쁜건 처음이야"라고 우스갯 소리를 하기도 했다. 상반기에 멍한 시간을 보내 좀 힘들었는데, 작품이 연이어 개봉하니 사람들은 왕성하게 활동하는 줄 알더라. 이게 안밖의 온도차인가 싶었다.
Q. 단편영화 '여배우'도 연출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는데 영화감독 문소리는 어떤 스타일인가?
A. 대학원 과제의 일환으로 한것이지 연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 부산영화제 초청을 받고도 무척 쑥스러웠다. 감독으로 현장에 갈때는 맨얼굴에 머리 질끈 동여메고 간다. 스태프들이 "배우가 저래도 돼?"할 정도로 놀라더라.
Q. 남편인 장준환 감독은 연출한 영화를 봤나? 어떤 평가와 조언을 남기던가?
A.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남편의 조언은 전혀 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현장에 한번도 안왔다. 딱 한번 매니저 차가 고장이 나서 촬영장소인 북한산까지 데려다준게 유일한 촬영장 방문이다. 남편이 봤을땐 많이 모자랐을텐데 영화를 보더니 "애썼어요"라고 하더라.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사진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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