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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美 조기 유학생, 구타·성폭행까지…말 못할 상처 많다

2년 전 부모와 떨어져 미국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자매가 교회 장로로부터 성폭행당했다.

이들 자매의 법적대리인(가디언)이자 홈스테이 주인이 야수로 변한 결과였다.

동생과 전화하던 중 언니가 학교도 가지 않고 울기만 한다는 말을 들은 한국의 엄마는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현지에 도착한 뒤 언니뿐 아니라 동생도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두 자매에게는 너무 큰 상처가 생긴 뒤였다.

미국 뉴욕에 있는 한국계 학원에 다니던 여중생(15)은 지난 4월 학원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대학생 한국인 강사(27)가 여중생이 혼자 있는 틈을 이용해 가슴 등을 만졌다.

부모에게서 떨어져 혼자 뉴욕에 머물렀던 이 여중생은 수치심에 고민하다 용기를 내 뉴욕가정문제연구소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강사를 처벌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는 '나홀로 조기유학'을 온 어린이들이 겪는 고통의 일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9월 뉴욕에서 조기유학을 시작한 남자 중학생(13)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케이스.

비싼 옷을 입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이유로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폭행까지 당했다.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한 이 학생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학생의 가디언은 학교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모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한국의 부모는 지난 2월 직접 뉴욕을 찾은 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아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다.

영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또는 선진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부모와 떨어져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 온 어린이들이 겪는 고통은 한국에 있는 부모들의 생각과는 달리 다양하게,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부모와 떨어진 데서 생긴 외로움이 정서적·심리적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것에서부터 평생 치유하기 힘든 큰 상처까지 각양각색이다.

10학년(고1) 여학생의 홈스테이를 맡았던 40대의 한 여성은 "그 학생이 친구를 사귀는 데 문제가 많아 힘들어했다. 영어를 잘 못하니까 위축되고, 친구들은 이를 오해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며 "그 학생은 애초 이곳에서 대학까지 다닐 계획이었으나 결국 10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5년 전 뉴저지로 유학온 11학년(고2) 남학생은 수시로 홈스테이를 바꾸고 있다.

여자속옷을 훔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한 곳에서 지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학생을 오래 지켜본 한 이웃 사람은 "정서적 불안으로 인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며 "정신과 의사로부터 상담 치료도 받았다고 하는데 나아지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학생의 부모도 이런 사실을 알지만 한국으로 데려가는 대신 홈스테이만 바꿔 주고 있다.

나홀로 조기유학을 오는 경우 공립학교 입학은 불가능하고 가디언을 정한 뒤 사립학교에 들어간다.

이들 어린이는 드물게 친인척 집에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한국에 있는 유학원이나 이곳에 있는 학원들의 소개로 홈스테이를 구해 생활한다.

학원 등의 소개로 홈스테이를 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들의 생활을 통제하는 책임까지 진다.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을 이용한 게임을 통제하는 일부터 때로는 학생들이 한국에 있는 부모들과 통화를 너무 자주 하지 못하게 막는 악역도 한다.

부모가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는 기숙사가 있는 보딩스쿨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보딩스쿨이 학생들에게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부모들은 안심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뉴저지주로 이민 온 지 30년이 넘었다는 한 교포는 일부 보딩스쿨 학생들이 금요일 또는 토요일 밤에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기숙사에 같이 있는 친구들과 함께 택시를 불러 맨해튼 한복판으로 진출해 밤을 즐긴다는 것이다.

뉴저지주에 본사가 있는 택시업체에서 일하는 한 기사는 보딩스쿨 고등학생들을 맨해튼까지 태워준 적이 여러 번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친구를 잘못 만날 경우 이런 일이 생긴다"고 나름대로 이유를 분석했다.

한국인 고등학생들이 밤에 주로 찾는 지역은 '한국 거리'로 불리는 브로드웨이와 32번가가 만나는 맨해튼 중심이다.

지난 3일 밤에도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드물지 않게 목격됐다.

개중엔 앳돼 보이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지만 고등학생이냐는 물음에는 한결같이 손사래를 쳤다.

근처에 사무실이 있는 한 직장인은 "어린 학생들이 자정이 넘도록 배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집에 갈 건지 걱정스러운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조기 유학생들이 겪는 고통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신적 고통은 물론 심지어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쉬쉬하기 때문이다.

뉴욕가정문제연구소의 레지나 김(74) 소장은 "성폭행 피해와 관련한 상담만 해도 평균적으로 일년에 한두 건은 들어온다"며 "부끄러워서 상담하지 못하는 경우는 더 많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학부모는 가해자를 고소할 경우 자녀의 신원이 노출돼 자녀에게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냥 넘기려 한다.

자매를 성폭행한 장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를 당하고도 쉬쉬하는 것은 '나홀로 조기유학'이 법의 인정 범위를 벗어난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한국 교육 제도상 초·중·고 학생이 부모를 동반하지 않고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불법이다.

부모가 외국에서 근무하게 돼 부모를 따라가는 경우에만 어린 학생들의 해외 유학이 인정된다.

하지만 부모들이 "내 자식의 앞길을 막지 말라"며 막무가내로 학교를 압박하기 때문에 일선학교의 교사들이 버티기가 쉽지 않다.

경기도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 50대 초반의 한 여교사는 "유학관련 서류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부모들이 교육청을 찾아가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래도 서류를 만들어 주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모들의 압력을 견뎌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나홀로 조기유학'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만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경우 불이익을 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학력 시험을 통과하면 그동안 빠진 한국 교육 과정을 모두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아 나이에 맞는 학년에 배치된다.

한국 교육당국의 한 관계자는 "나홀로 조기유학을 했다는 이유로 나이에 맞는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게 맞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나홀로 조기유학이 돈이 많아서만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제도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왕따를 당한 학생들이 돌파구를 찾아 오는 경우도 많다.

뉴저지주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50대 초반의 원장은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는 데 따른 메리트가 과거에 비해 떨어지면서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만 혼자 조기유학 오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며 "오히려 최근에는 한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워 오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그러나 "한국에서 어려움을 겪은 어린이는 이곳에 와서도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며 "부모들은 가디언이나 홈스테이업자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으로 마음을 놓지만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반적으로 나홀로 조기유학은 감소하고 있다.

한국에서 경기가 좋지 않은 데다 국제학교가 많이 생겨 영어를 배우는 게 이전보다 쉬워졌으며, 조기 유학을 다녀온 데 따른 이점도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조기유학 비용은 학원이나 학군 등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1년에 1억원 정도가 든다.

사립학교에 내는 학비가 연간 1천만원 정도이고, 가디언, 홈스테이업자 등에게 주는 비용이 월 700만∼800만원 수준이다.

보딩스쿨에 다닐 경우 비용이 더 올라간다.

나홀로 조기유학을 온 어린이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알려지면서 뉴욕에서는 제도개선도 추진되고 있다.

한국계인 론 김 뉴욕주 하원의원은 학원 교사, 가디언, 홈스테이 업주 등의 신원 조회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어린 학생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자격 요건이 자연스럽게 상향조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도 개선에 앞서 부모들이 '나홀로 조기 유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영어 교육을 이유로, 또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어린 나이의 학생들을 부모에게서 떼 놓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이다.

레지나 김 소장은 "제발 어린 자녀들을 조기유학 보내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어린 학생들을 조기 유학 보냈다가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면서 "자녀들에게 평생 씻지 못할 아픔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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