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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 '하얀 가루' 하나로 노벨상 후보에 우뚝

[취재파일] 이 '하얀 가루' 하나로 노벨상 후보에 우뚝

최근 한국인 과학자 한 명이 노벨상 물망에 올랐습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유룡 단장(카이스트 특훈교수)입니다. ‘톰슨로이터’라는 학술 정보 서비스 업체가 그를 노벨화학상 후보로 지목한 것입니다. 이 업체는 매년 노벨상 시즌 직전, 이렇게 노벨상 후보 명단을 내놓고 있습니다. 업체의 권위와 이름값을 높이려는 자가 발전 성격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적중률을 보면 무시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톰슨로이터는 2002년부터 노벨상 후보 예측을 시작했습니다. 논문 인용 회수는 기본이고, 해당 연구 분야를 창시했는지 여부, 그리고 후속 연구 성과, 또 연구 결과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이런 걸 종합적으로 판단해 예측 명단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작년까지 과학 분야에서 모두 156명을 지목했습니다. 이 가운데 25명이 실제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누적 적중률이 16% 정도 되는 셈입니다.

노벨상 분야마다 적중률은 조금씩 다릅니다. 현재까지 노벨생리학상 분야는 61명 가운데 12명이 받아서 적중률이 거의 20%에 달하고, 물리학분야는 54명 중 9명이 받아서 17%, 그리고 유룡 단장이 관련된 노벨화학상 분야는 41명 가운데 4명이 상을 받았습니다. 10% 정도 되는데, 다른 분야에 비해서는 적중률이 좀 낮은 셈입니다. 그래도 1%도 아니고, 10%라고 하니, 아직 과학 분야 수상자를 배출해낸 적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유룡 단장의 연구 성과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기능성 메조나노다공성 탄소물질 및 제올라이트 분야의 개척자”이다. 또 “2011년 사이언스는 그가 연구한 ‘특수 설계된 나노구조 유도 물질을 이용한 규칙적 위계나노다공성 제올라이트 합성’을 10대 과학기술 성과로 인정했다”는 내용도 보도자료에 포함시켰습니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암호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제목만 봐도 눈이 어질어질, 어디 치워놓았을 보도자료인데, 노벨상 물망에 오른 한국인 과학자의 연구 성과라고 하니,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전문가에게 묻고 물어, 연구 성과를 최대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유룡_캡션_640

자, 유룡 단장이 만든 것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간단합니다. ‘하얀 가루’를 만든 겁니다. 실험실에서 이것저것, 주로 액체를 섞어서 개발했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건데, 그가 마치 조물주처럼 창조했습니다. 그럼 그 하얀 가루가 대체 뭐기에, 어디다 쓰는 것이냐? 이걸 물어보시면, “휘발유나 경유 만들 때” 쓴다고 쉽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정유공장에서 씁니다. 휘발유는 물론 지금도 만들어지는데, 유 단장의 기초 기술을 상용화하면 휘발유를 더 잘, 저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친구끼리 얘기할 때는, 일단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겠습니다. 하얀 가루의 쓰임새에 대한 것입니다. 원유 속의 여러 성분은 서로 끓는점이 다릅니다. 이걸 이용해서 휘발유와 등유, 경유 등을 분리하죠. 근데 원유를 1차 정제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건 벙커C유입니다. 화력발전소에서 보일러 연료 등으로 쓴다고 합니다. 휘발유보다 훨씬 싸고, 소비량도 적습니다. 그래서 정유사 입장에선, 벙커C유를 소비량이 많고 수익을 남길 수 있는 휘발유나 경유로 전환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걸 ‘크래킹(cracking)’ 공정이라고 하는데, 유룡 단장이 만든 하얀 가루를 바로 그때 쓸 수 있습니다. 크래킹 작업의 촉매입니다. 오늘 출퇴근할 때 여러분이 소비한 휘발유나 경유를 이렇게 만듭니다. 현재 생산되는 전체 원유의 1/3 정도는, 이 크래킹 공정을 통해 휘발유나 경유로 몸값을 높입니다. 하루 1천만 배럴 이상의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돈이 되는 하얀 가루입니다.

하얀 가루가 그렇게도 특별한 것은, 바로 ‘구멍’ 때문입니다. 육안으로는 절대 안 보입니다. 사진 보면, 그냥 밀가루 같습니다. 근데 이 가루를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엄청나게 미세한 구멍이 뽕뽕 뚫린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노’라는 단위를 씁니다(1나노미터=10억 분의 1미터). 구멍 크기는 보통 1나노미터보다도 작습니다. 벙커C유를 이루는 탄화수소들은 하얀 가루의 이 미세한 구멍을 통과하면서 잘게 잘게 찢어집니다. 그래서 휘발유가 되고, LPG가 되기도 합니다. 마치 현대판 연금술처럼 신비롭게 들립니다. 그러니까 석유화학에서, 이 하얀 가루는 없어서는 안 되는 실로 금가루인 셈입니다. 지난 5월 에스오일이 유룡 단장에 대해 6년간 3억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는데, 이유를 아시겠죠?

하얀 가루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제올라이트’입니다. 광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연에도 물론 존재하고, 지금도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저렴하게 합성한 걸 쓰고 있지만, 지금 건 입자가 너무 큽니다. 물론 그 말도 안 되게 작은 ‘구멍에 비해서’ 크다는 얘기입니다. 입자 크기가 머리카락 굵기, 수 마이크로미터 정도 됩니다(1마이크로미터= 1나노미터의 천 배). 그러다 보니, 제올라이트 입자 하나마다 구멍이 수천 개나 됩니다. 기초과학연구원 조창범 박사는 이걸, 거대한 코끼리가 대문 수천 개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코끼리 교통체증, 미어터지겠지요. 벙커C유가 휘발유나 경유로 변신하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입자 크기가 작은 제올라이트가 좋습니다. 근데 그건 실험실에서 ‘개발’해야 합니다. 빚어내야 합니다. 원래 있던 걸 찾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합성해 만드는 것이 촉매로서의 성능은 더 좋습니다. 이 분야 화학자는 그래서 건축가와 똑같습니다. 제올라이트의 설계도를 구상하고 그걸 설계대로 만들어내느라 밤을 샙니다. 유룡 단장 연구팀은 아주 아주 작은 입자로 구성된 하얀 가루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가, 2009년 비누나 샴푸에도 들어있는 (물론 같은 종류는 아닙니다), 계면활성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계면활성제로 하얀 가루를 만든 건 세계 최초였습니다.

2009년,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엄청나게 얇은 제올라이트입니다. ‘엄청나게’라는 표현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두께가 겨우 ‘2나노미터’밖에 안 됐습니다. 이론상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얇은 두께를 현실화했습니다. 하도 얇으니까 판처럼 생겼다고 해서, ‘판상형’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2나노미터의 판에는 작디작은 마이크로 구멍이 골고루 뚫려 있었습니다. 제올라이트를 이렇게 얇게 만들다 보니, 분자(벙커C유)가 얇을 층을 뚫고 쉽게 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촉매 효율성이 크게 좋아집니다. 연구팀은 당시 “기존의 제올라이트 촉매보다 수명이 5배 이상 길어서, 촉매를 교체하는 주기를 연장함으로서 경제적 효과가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세계 석유화학 업계의 귀가 번쩍 뜨일 얘기입니다. 논문은 네이처에 게재됐습니다.

2009년 하얀 가루의 입자는 작아질 대로 작아졌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코끼리가 통과할 문의 크기, 즉 구멍의 크기입니다. 앞서 코끼리 교통체증을 없애려면, 입자 자체의 크기가 작아야 좋다는 얘기를 했는데, 대문 크기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석유화학 산업에서 지금까지 써온 하얀 가루, 그 합성 제올라이트 구멍의 크기는 너무 너무 작습니다. 대부분 1나노미터도 안 됩니다. 그럼 벙커C유를 이루는 탄화수소들이 몸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벅찹니다. 쉽게 말해, 사람이 다니는 문에 거대한 코끼리를 우겨넣는 꼴이라고 보면 됩니다. 꽉 꽉 막힙니다. 역시 촉매로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011년, 그 구멍 크기에 대한 연구 성과가 나왔습니다. 또 한 번 도약하는 순간입니다. 사실 2009년 2나노미터의 엄청 얇은 제올라이트를 만들었을 때도 약간 큰 구멍은 있었습니다. 10나노미터 정도 되는 구멍입니다. 화학자들은 그걸 '메조 구멍'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메조'는 2~50나노미터의 크기를 뜻합니다. 당시 그 메조 구멍은 사실 연구진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고, 판에도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뚫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는 그 약간 큰 메조 구멍과, 기존 제올라이트에도 있는 작은 마이크로 구멍이 '규칙적으로' 섞여 있는 걸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건 3차원 구조입니다. 화학자가 미시 세계의 건축가가 되는 순간입니다. 역시 세계 최초입니다. 2009년 2차원 종잇장 같던 걸, 2년 만에 벌집 모양의 3차원 제올라이트를 개발했습니다.
제올라이트

이렇게 메조 구멍과 작은 구멍이 섞여 있으면, 촉매의 성능이 극대화됩니다. 연구진은 이걸 도로에 비유했습니다. 큰 도로만 있던 도시에 구석구석 작은 도로를 계획적으로 설계하면 교통 흐름이 더욱 좋아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했습니다. 구멍이 6각형 벌집처럼 배열된 흰색 가루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계면활성제를 성공적으로 개발한 결과입니다. 유 단장이 ‘메조다공성 제올라이트 분야의 개척자’라는 표현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논문은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셨으면, 이제 한글은 한글인데, 암호처럼 난해하기만 했던 표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서 나왔던 ‘기능성 메조나노다공성 물질’, 이 암호를 풀어보면, 석유화학 산업에서 촉매의 기능을 하는 약간 큰 나노 구멍이 많이 뚫려있는 물질이라는 뜻입니다. 또 2011년 연구 성과인 ‘규칙적 위계나노다공성 제올라이트 합성’이라는 암호는, 나노 수준의 크고 작은 구멍이 벌집 모양의 규칙적인 배열로 많이 뚫려 있는 제올라이트를 만들어냈다, 이런 뜻입니다. 사이언스는 그해, 유룡 단장의 연구 결과를 10대 과학기술 성과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이 하얀 가루를 만드는 법은 아직 실험실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석유화학 산업 현장에 적용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돈’입니다. 하얀 가루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돈 때문입니다. 사실 촉매 공정에서 촉매 값은 1%도 안 될 정도로 작긴 합니다만, 어쨌든 실험실 촉매는 지금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쓰는 촉매보다 10배 정도 비싸다고 합니다. 촉매 생산에 필요한 계면활성제 재료 자체가 상당한 고비용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습니다. 현재 연구실 장비를 이용하면 3~4일 만에 하얀 가루 50g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의 논문은 19,800번 넘게 인용됐습니다. 1,000번 넘게 인용된 논문도 3편입니다. 특히 인용 회수를 기준으로 상위 1%에 드는, 이른바 ‘고인용 논문’도 12편이나 됩니다. 2013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마틴 카플러스는 고인용 논문이 7편, 아리 워셜이 9편, 그리고 2010년 수상자 스즈키 아키라는 3편이었습니다. 기초과학연구원이 올해의 노벨상 예측에 대해 약간의 희망 섞인 보도자료를 낸 배경입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는 모레(8일) 저녁에 발표됩니다. 꼭 올해가 아니어도, 세계 최초의 독보적인 ‘흰색 가루’로, 우리나라에서 과학 분야의 첫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감수: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 조창범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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