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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의료인, 환자 응급구조에 나서기 더 어려워

[월드리포트] 의료인, 환자 응급구조에 나서기 더 어려워
59살 왕웨이윈 씨는 후난성 시둥현의 한 종합병원 로비에서 쓰러졌습니다. 치료비를 내기 위해 수납처 앞에 줄을 서있다 심근경색이 온 것입니다. 이왕 심장 발작이 일어났다면 그 장소가 병원이라는 점은 일종의 행운이죠. 누군가 구급차를 부르고 구조대원이 와서 싣고 병원으로 옮기는 그 모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라면 어떤 장면이 벌어졌을까요? 잘 훈련된 의사나 간호사가 달려와 응급조치를 하고 그 환자를 재빨리 응급실로 옮겨 적절한 치료에 들어갔겠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쓰러지는 순간 마침 의사 1명이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의사는 왕씨에게 와서 응급처치를 하는 대신 왕씨가 손에 잡고 있던 진료 기록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지를 수납처에 넘겨주더니 슬금슬금 사라졌습니다. 그 의사 뿐이 아닙니다. 이후 7분 동안 모두 7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왕씨를 봤지만 어느 누구도 조치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그나마 청소원 한 명이 왕씨를 끌어 일으켜보려 했고 이동식 침대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심장 발작이 일어났을 때 최초 4분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 시간 안에 적절한 심폐소생술을 받으면 생존 확률이 50% 높아집니다. 하지만 왕씨의 경우 그 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주변에 있었지만 '골든 타임'은 그냥 흘러갔습니다. 7분이 지나서야 한 의사가 흉부압박법을 실시했습니다. 그나마도 딱 2분 해보더니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즉시 손을 떼고 가버렸습니다. 드라마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제세동기, 흔히 전기충격기라고 부르는 기구는 아예 쓰이지도 않았습니다.

취파

그렇게 왕씨는 12분쯤 병원 로비 찬 바닥에 누워있었고 결국 숨졌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해당 병원의 태도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입니다.

최초 왕씨의 혼절 장면을 목격했던 의사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환자가 그렇게 쓰러져 숨질 줄을 몰랐습니다. 근본적으로 응급처치를 해야 할 상황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 환자가 숨졌다는 소리를 듣고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 충격 받았습니다." 정말일까요?

화면에서 그 의사는 가장 먼저 왕씨의 진료기록지부터 들여다봤습니다. 아마 무슨 병을 가진 환자인지 확인하려고 했겠죠. 당시 왕씨는 아직 의식이 있어 몸을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했고 매우 가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봐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됐습니다. 그런데 산부인과 전문의였던 그 의사는 정말 몰랐을까요? 의사는 뭔가 겁을 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잠깐 주변을 서성이더니 사라졌습니다. '별 일 아니구나' 생각하고 털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뭔가 갈등하고 우려하다가 포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병원은 해당 폐쇄회로 화면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거칠게 막았습니다. 심지어 유족들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를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방치한데 대해 유족들이 따지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정상이 아니죠. 비정상인 상황이죠. 하지만 의료인들이 모두 고매한 인격자들은 아니잖아요?" 어이없고 뻔뻔합니다.
 
하지만 그런 병원의 대답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응급조치에 나서려면 실제 병원의 표현대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특별히 사명감이 투철하거나 대단한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왕씨를 구조하려면 다음의 가능성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왕씨를 구조한 뒤에 왕씨가 "나는 구조를 요청한 적 없다. 따라서 그에 들어간 비용을 내지 못 하겠다"고 버틴다면 그 모든 비용은 구조를 실시한 의료인이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합니다. 법규가 그렇다고 합니다. 환자 가족의 동의 없이 중대한 의료 행위를 한데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든 의료행위는 본인이나 보호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과와 상관없이 부적절한 의료 행위로 치부돼 벌금을 내고 심지어 사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구조행위를 하다가 환자가 사망할 경우 의료 과실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구조를 제대로 못해 환자를 죽게 한 것 아니냐는 추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환자 가족들의 보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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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하니 나서지 않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이 이 수많은 법적 책임을 지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다시 말해 왕씨에게 일어난 불행은 해당 의료인들의 자질이나 인성 문제이기보다 제도나 시스템의 허점 탓으로 봐야 하는 면이 더 큽니다.
 
사실 의료인들이 처한 이런 부조리는 비단 중국만의 사정은 아닙니다. 의료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는 미국,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 나섰다가는 비슷한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라들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긴급한 상황의 환자를 구조하기 위해 벌인 의료행위에 대해 앞에서 말한 각종 법적 책임을 감해주거나 면해줍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돕고 나서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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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해당하는 법규가 있습니다.

응급의료법 제5조 2항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 조항에는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 응급의료 종사자나 -선원법 해당 조항에 따른 선박의 응급처치 담당자 -소방기본법 해당 조항에 따른 구급대 등 다른 법령에 따라 응급처치 제공의무를 가진 자가 아닌 사람이 실시한 응급처치를 제공해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에 대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해당 행위자는 민사 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사망에 대한 형사 책임을 감면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엥? 그런데 이 법에 의하면 의료인은 해당 사항이 없네요? 그래서 같은 법 63조로 이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 응급처치 및 의료행위에 대한 형의 감면 조항은 “응급의료종사자가 응급환자에게 발생된 생명의 위험, 심신상의 중대한 위해 또는 증상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긴급히 제공하는 응급의료로 인해 응급환자가 사상에 이른 경우 응급의료행위가 불가피하고 응급의료 행위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을 때 정상을 참작해 형법 제268조의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법 조항 답게 말이 무척 어렵죠? 좀 쉽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의료인이나 이에 준하는 책임자가 아닌 경우 다른 사람의 응급한 상황을 구하기 위해 실시하는 의료적인 행위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면제, 또는 감면 받는다. 또 의료인 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직무 행위 밖에서 우연히 긴급한 응급 구조 행위를 한 것이라면 법적 책임을 면제나 감면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국 왕씨의 경우도 만약 이와 같은 법규가 있었다면 장소가 병원이더라도 해당 의사나 간호사가 자신이 업무 외에 행하게 된 응급 의료 행위에 해당하는 만큼 마음 놓고 응급 조치에 나설 수 있었겠죠?
 
그런데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이 내용을 물어보니 다들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짓습니다. 해당 조항만 믿고 함부로 나설 수 없다고 합니다. 문제 단서가 있어서입니다. 바로 '중대한 과실이 없다'는데 대한 해석입니다.

의료인은 의료 전문가이고 또 관련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과실 여부를 판단할 때 일반인보다 훨씬 엄격한 판단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중대한 과실'에 대한 잣대가 더 까다롭다는 것이죠. 따라서 일이 잘못되면 책임지게 될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것입니다. 응급의료법 5조 2항에서 굳이 의료인을 분리해 따로 63조 규정을 마련한 것은 이런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병원에서 왕씨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군요.

 선한 사마리아인을 법과 제도로 해당 비유 속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 상식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중국이든, 우리나라든 선행을 막지 않도록, 나아가 유도할 수 있도록 관련 시스템 정비가 시급해보입니다.   


▶ 병원에서 쓰러졌는데…의료진도 '나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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