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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바다와 술과 삶에 대한 예찬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취재파일] 바다와 술과 삶에 대한 예찬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이 책은 바다에서, 바다를 살고 있는 한 사나이의 바다 사랑, 술 사랑을 담아 빚은 보물이다. 이 책엔 무릎을 치며 술잔을 기울여야 할 문장들이 가득하다. 섬에서 나서 섬사람 뱃사람으로 살아온 저자의 글에선 소주 향기가 난다.

"내 이 별이 뭔고 했더니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이었구만그래."

서문에 나오는 이 말부터가 매력 덩어리다. (이 말은 저자 본인의 말이 아니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여행한 다른 시인의 말이긴 하지만.)

이어지는 글들은 그의 말대로 '바다에 대한 대답'이다.

"술은 바닷물과 더불어 가장 가깝게 지낸 액체이며 무언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나는 오늘도 바닷가에서 술잔을 든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어지는 챕터 '죽음과 마주하여 소주 한 사발 - 팔경호 이야기'는 1959년 태풍 사라호를 정면으로 뚫고 살아남은 뱃사람들의 이야기다. 섬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절체 절명의 순간을 함께 한 소주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단편소설같다.

다음 챕터 '집'에서는 섬에 사는 외로운 남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각시도 없는 새끼'가 가장 심한 욕이 되는 이유, 귀신 나오는 집만 골라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을 씁쓸하지만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사내의 말투로 풀어내는 가운데, 안주처럼 이런 문장들이 끼어 나온다.

"또 한잔 마신다. 멸치 대가리는 일곱 개째."

바닷가 사내의 술 이야기니까 당연히, 성인용 음담도 섞여 나온다. 때때로 이런 대목에 키득거리다보면 "또 한잔"과 함께 하는 멸치 대가리는 어느새 이 챕터에서만 열일곱개로 불어난다.

열일곱마리의 멸치와 함께 아마도 최소한 그 만큼의 소줏잔을 비웠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밤이 깊다. 지금쯤은 '각시도 없는 새끼 1번'도 잠이 들었을 것이다. 바깥을 내다보니 저 멀리 마을의 가로등 불빛만 아르르 떨고 있다."

이 문장에 얽힌 사연은, 책을 사서 읽어보실 독자들을 위해 물음표로 남겨 둔다.

'이별은 훈련이 안돼 - 서쪽 항해기'에서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상선에 올라 홍콩을 지나 인도양을 항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쯤 나는 원래 오늘을 무알콜로 지내려 했던 결심을 꺾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온 참이다. 술잔을 비울 때와 같은 감탄사를 유발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연필 들고 밑줄을 긋다가 그만두었다. 온 책이 다 새카매질 판이다.

"콜롬보호는 계류삭을 벗겨낸다. 배와 땅이 오 센티, 십 센티, 삼십 센티, 이렇게 떨어진다. 긴 항해가 막 시작되는 짜릿한 순간, 사막을 향한 낙타의 첫발자국 같은, 첫번째 술잔 같은, 연인의 입술에 막 첫 키스를 하는 것 같은, '자 이제 시작입니다' 하늘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는 순간이다."

"선수에 서다. 이곳에 오면 엔진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가 부드럽게 갈라지는 소리만 난다. 나는 물방울 행성의 얇은 껍질을 미끄러지고 있는 중이다."

이런 감각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치열한 인생의 내공이 느껴지는 묵직한 문장들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버틴다.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배는 전복되거나 떠밀린다. 떠밀림의 끝은 좌초이다. 배가 그냥 있으면 훨씬 심하게 파도를 탄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싣고 있으면 더하다. 그러니 가야한다. 울어도 가야 한다."

바다사나이 다운 해학도 자주 등장한다. 상선에서 술 좋아하게 생긴 어느 선원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엔간히 마시고 살았습죠. 버릇처럼 손이 가고 거부당하지도 않고 새삼 덧붙일 정이 있는 것도아닌데 아직 붙어산다는 점에서 저와 술은 그쪽분과 부인 같은 관계일 겁니다… (중략)

 어선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험한 곳입니다… (중략)… 약은 하납니다. 소주를 마시죠.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이런 식이다. 마지막 인용문 뒤에 "그곳에서는 술이 가진 기본 영역, 그러니까 관계 형성과 에로티시즘을 넘어선 물리적인 치료약으로 쓰인다"고 할 정도로, 바다와 술에 대한 작가의 사색은 깊다.
밥상
제목이 왜 '…자산어보'일까 싶은데, 이 책은 4년전쯤 나왔다는 전작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의 속편 격이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40년 생계형 낚시꾼"을 자처하는 작가가 물고기와 갯것 잡아 먹는 얘기들을 쓴 책이다. 먹는 얘기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보다 더 많이 나온다. 그에 비하면 "술상"편은 바다와 술을 살아내는 사람들(주로 사내들) 얘기 위주다.

가끔은 바다를 보러가서 마음을 치유하고픈 사람들, 가끔은 싱싱한 해산물 안주에 소주 한잔이 생각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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