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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가스 부국 이집트엔 가스가 없다? - 이집트 정전사태의 속사정

[월드리포트] 가스 부국 이집트엔 가스가 없다? - 이집트 정전사태의 속사정
저는 ‘새마을운동’ 세대입니다. 코흘리개 시절 이유는 모르지만 집에 가끔씩 정전(停電)이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보통 라디오 뉴스에서 정전 지역과 시간을 예고했고 또 통장 아주머니가 집집 돌아가며 알려주시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랬는지 그때는 한 두 시간 제 주변의 모든 불이 꺼진 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마음이 설레면서 기다려질 정도였습니다.

정전이 되면 어김없이 촛불이 켜졌습니다. 형과 함께 손가락으로 촛불을 통과하고 엄지와 검지로 촛불을 끄는 차력?놀이도 했습니다. 손전등 빛으로 집 안 벽에다 가나다라 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놀았습니다. 더운 날이면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또래 아이들과 달빛아래서 뛰어 놀던 기억도 납니다. “나 클 때는 촛불 켜놓고 공부했다”라는 부모님 말에 촛불 밑에서 동화책을 펼쳐놓기도 했습니다. 정전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제게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정전이 요즘 다시 찾아왔습니다. 새로 찾아온 정전은 제 달콤한 추억을 짜증나는 현실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카이로 마디 지역은 우리 교민을 포함해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입니다. 이곳이 요즘 아침, 점심, 저녁, 새벽을 가리지 않고 불이 꺼집니다. 그것도 예고 없이 아무 때나 꺼집니다. 동네를 가로세로 100미터 정도 단위로 아주 잘게 쪼개서 돌아가면서 정전이 됩니다. 한 번 정전이 되면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나야 불이 다시 켜집니다.

이 정전의 파급력은 막강합니다.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니 더 그렇습니다. SBS 카이로 지국이 있는 건물도 정전으로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갇히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119에 전화할 일이지만 여기선 워낙 다반사로 벌어지니 건물 경비원이 능숙하게 엘리베이터 문을 수동으로 열고 꺼내줍니다. 이 정도는 양반, 정말 절 괴롭히는 건 인터넷입니다.

이 시대에 인터넷이 끊긴다는 건 네 목소리와 손, 발까지 모든 걸 앗아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한국과 연락도, 기사 전송도, 검색도, 송출도 못합니다. 정전되는 시간과 장소라도 미리 알려주면 그 시간을 피해 일하던지 아니면 다른 곳이라도 찾아갈 텐데 숨바꼭질을 하듯이 정전 구역도 이제는 마음대로 뒤섞어 놓습니다. 어제는 우리 집과 앞집이 정전됐는데 오늘은 우리 집과 뒷집이 정전되는 식입니다. 그래서, 이 곳은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충전식 전등을 다들 몇 개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촛불 대용이죠. 그렇다고 꺼진 인터넷은 불이 다시 들어오기 전까지는 깜깜무소식입니다.

카이로의 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넘나듭니다. 에어컨은 필수 덕목입니다. 정전이 되면 에어컨은물론 선풍기도 돌지 않습니다. 처음엔 창문을 열어놨는데 오히려 뜨거운 바람만 들어옵니다. 그래서 요즘은 차라리 정신수양하는 마음으로 책상머리에 복지부동 자세로 앉아 사우나를 즐기는 편입니다.

관공서도 정전을 피해가지 못합니다. 가뜩이나 일처리가 느린 데다 정전까지 찾아오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공무원들은 아예 일손을 놓고 차나 마시고 수다나 나눕니다. 민원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발길을 돌립니다. 이집트에 진출한 한국기업 지사들도 정전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안 되는 정전 시간은 업무 마비입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정전 때문에 미칠 정도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은 더욱 심각합니다.

수술하는 데 불이 꺼지고 산소호흡기와 수술기구가 멈춘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자체 발전기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공장과 건설현장, 병원, 호텔은 저마다 자체 발전시설을 설치해놨습니다. 냉방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원과 인터넷 정도는 충분히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도 답답한 마음에 무리해서라도 발전기를 구입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정말 쓸만한 건 다 팔려나갈 정도로 가격도 오르고 귀한 물건이 됐습니다. (대부분 발전기가 중국산인데 이집트는 세관 통과가 쉽지 않아 물건을 주문해도 오는데 몇 달이 걸리곤 합니다. 정작 필요한 땐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공급이 될 땐 이미 수요가 시든 상태가 자주 일어납니다.)

이렇게 정전으로 인한 불편함은 자연스럽게 왜 정전이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 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옮겨집니다.

이집트는 중동·아프리카에서 천연가스 매장량이 8번째로 많은 나라입니다. 아프리카 제 1의 오일 매장국입니다. 에너지 자원이 넘치는 나랍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정전사태로 고생을 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무바라크 30년 독재 시절 하도 부정축재에 심하다 보니 발전소가 부족해서 그런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침 카이로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지역에 한국의 한 기업체가 화력발전소 건설을 하고 있어 그곳 담당자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발전소가 완공이 되면 전력상태가 좀 나아질까요?” 돌아온 답은 “아휴, 그래 봤자 코끼리 비스킷이에요. 발전소 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돌릴 연료가 없어요.” 엥? 천연가스가 넘쳐나는 나라에 연료가 부족하다고? (아~ 글을 쓰는 도중에 또 정전이네요. 오늘만 벌써 세 번쨉니다. 일단 저장해놓고…)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카이로 주변의 발전소는 5개입니다. 모두 가스와 오일을 이용한 화력발전소로 현재 가동되는 건 3곳이더군요. 그럼 그렇지, 발전소가 문제야 하고 가동률을 알아봤더니  고작 25~30% 였습니다. 정말 연료부족이더군요.

그럼 왜 연료가 부족한 것일까? (수치를 적다 보면 한도 끝도 없고 이해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가급적 숫자는 배제하고 적겠습니다.)  이집트는 천연가스가 많이 나오는 나라이긴 하지만 이 천연가스를 실제로 우리가 쓰고 있는 LNG(액화천연가스)로 정제 가공할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무바라크 시절 한 일이 없다는 말이 맞긴 맞더군요.) 어쨌든 이집트는 사정이 그렇다 보니 천연가스를 파내서 대부분을 이스라엘과 시리아, 요르단 등지에 수출을 해왔습니다. 그리곤 수출해서 받은 돈으로 정제된 LNG를 역수입해왔습니다. 싸게 팔아서 비싸게 다시 사오는 적자 장사를 수십 년 반복하는데 견뎌낼 곳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밑지는 장사라 하더라도 땅 밑에 바다 밑에 넘치게 있는 천연가스를 더 많이 파내 국내에서 쓸 연료는 공급하면 될 일 아니냐? 그런데 이것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더군요. 이집트의 천연가스는 모두 영국 등 외국 기업이 도맡아 채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정부의 곳간이 바닥나니 이들 기업에 줄 돈이 당연히 모자를 테죠. 현재 이집트 정부가 원유 생산하는 외국 기업에 밀린 대금만 우리 돈 7조 원이 넘습니다. 이런 상태니 외국 기업들이 천연가스를 더 파내라고 해도 그 말을 듣겠습니까? 돈도 못 받는 상황에서 내 돈 들여가며 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매장지 개발은커녕 지금 파내고 있는 천연가스도 자꾸 일부러 생산량을 줄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출하는 천연가스 원유양도 줄겠죠? 실제로 2010년 부터 이집트의 천연가스 수출량은 매년 30%씩 줄고 있습니다. 그럼 들어오는 돈도 부족할 테고 정제된 LNG를 사오지도 못 하면 정작 국내에서 쓸 연료가 바닥이 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연가스 원유 정제를 그 동안 이웃나라 카타르가 많이 해줬는데 무슬림 형제단이 축출된 이후 카타르가 등을 돌리면서 정제작업을 할 곳도 사라졌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엘 시시 정권은 러시아에 손을 벌렸지만 러시아까지 천연가스를 보내고 다시 받아오는 비용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크진 않더라도 비슷한 크기 정도입니다.

(사정이 이런대도 이집트는 자신들이 쓸 전기도 부족하면서 오늘도 가자지구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맹주라는 옛 명성을 잃고 싶지 않아서라고 현지인들은 말합니다.)

사실 이집트의 정전 문제는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닙니다. 제가 연수생 입장으로 이집트에 온 지난해에도 정전은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였습니다. 참을 만 했습니다.(개인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러던 게 최근 들어 하루 4~5차례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라마단 때 단전을 안 하는 대신 지금 몰아서 정전을 하고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전력난은 그저 연료부족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막대한 정부보조금 덕에 그 동안 물보다 싼 석유관련 에너지(생수 1.5리터 한 병에 400원, 휘발유 1리터에 250원)를 물처럼 써온 이집트인의 생활습관도 분명 한 원인입니다. 이집트 시민은 절전에 대한 고민보다 정전에 대한 불만만 가득합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이집트 정부의 대응입니다. 누구나 뻔히 아는 사정인데도 이집트 정부는 전력난의 원인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엘 시시 군부정권에 축출된 무르시 전 대통령의 지지기반인 무슬림형제단과 이슬람 과격단체가 송전탑을 부수고 전력 케이블을 절단하고 있어 요즘 같은 정전사태가 발생한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오늘(21일) 현지 신문에도 이집트 총리는 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달부터는 정전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집트 전력부장관은 정전이 사라지려면 최소 4년이 걸린다고 밝힌 지 하루 만에 정부의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과연 믿을 만한 말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일단 9월이 밝아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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