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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인물로 보는 ARF 외교 열전

[취재파일] 인물로 보는 ARF 외교 열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가 지난 토~일 이틀간 열렸습니다. 토요일은 실무 접촉과 환영 오찬 등 사전 행사가 진행됐고, 일요일은 외교장관 토론 등 본 행사가 열렸습니다.
ARF는 남북을 포함해 미, 중, 러, 일 등 북핵 6자회담 참가국이 모두 참여하는 유일한 아태지역 안보 협의체입니다.

당해의 가장 뜨거운 동북아 외교 이슈가 이 자리에서 논의되고, 아세안 지역 국가는 아니지만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도 참여해 신경전도 벌이는 탓에 '미니 유엔'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직접 가서 보니,  최근 동북아 주요국들의 움직임이 기존 수십 년간 유지돼온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한 세대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나 할까요?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확실한 우위나, 한미일 동맹의 굳건함, 언제나 외톨이인 북한과 같은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겁니다. 과도기인 시기에 열린 이번 ARF는 그만큼 혼란스러웠고, 각국의 외교전도 그만큼 치열했습니다.

이번 ARF에 참가한 우리 주변국들의 치열했던 셈법과 움직임들을 각국의 외교수장들을 중심으로 한 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외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개인마다 외교 스타일도 모두 다르고, 출신이나 배경에 따라 추구하는 바도 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동북아 지역 외교를 이해하는 데 좀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 북한 리수용 외무상

사실 이번 ARF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았던 인물은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핵문제 등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플레이어인데다, 리수용이 지난 4월 외무상으로 취임한 뒤 국제 다자회의에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 외상은 스위스와 제네바 대사로 다년간 근무했습니다. 과거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김정은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씨 일가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김정은은 전 후견인이었던 장성택을 지난해 12월 숙청한 뒤, 4월에 리수용을 불러 외무상으로 앉혔습니다. 즉 리수용이 김정은의 큰 신뢰를 받고 있으며, 그만큼 북한 외교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한 파워를 갖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RF 전까지 리수용은 해외생활이 많았던 만큼 전 외무상과 달리 보다 개방적이고, 대외발언도 활발하게 하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리 외상은 공항에서 만난 취재진의 질문을 외면했고, 숙소도 취재진과 남한 국적 사람의 출입을 막는 등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난 9일 환영만찬에서 윤 병세 외교부장관이 다가가 악수를 청하면서 간단한 인삿말을 건넸지만, 대답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우리 당국자들은 "리수용이 첫 국제무대라 그런지 다소 경직돼 보였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여타 국가들과의  양자 회담은 활발하게 진행했습니다. ARF 개막 이후에도 불투명하다고 했던 북중 양자회담과 북일 양자회담을 모두 성사시켰습니다. 북중관계가 예전같지 않은 상황이었고, 일본도 ARF에 참석한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드러내놓고 이들과 양자회담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자체가 북한 입장에서는 큰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리 외상은 ARF 전후로 아세안 국가들을 순방하면서 북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리 외상은 ARF가 끝나자마자 또 인도네시아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리수용의 이런 활동력과 북한 내 영향력을 감안할 때, 향후 한반도 외교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2. 중국 왕이 외교부장

왕이 부장은 리 외무상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릅니다. 훨칠한 키에 배우 같은 외모, 중후한 목소리와 유려한 매너까지... 올초 시진핑 주석 방한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에도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와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ARF에서 왕이 부장은 감기가 걸려 컨디션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향적인 성격은 그대로 발산됐습니다.

한국 취재진이 화장실 가는 그를 붙잡고 "일본이나 북한과 만날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옆으로 지나가자 왕이 부장은 기시다에게 "See you"라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취재진이 "그럼 일본과 볼(회담할) 거란 얘긴가"라고 묻자, 왕이 부장은 웃으며 "I have no idea"라고 답했습니다. 취재진은 다시 "idea는 없지만, 만날 plan은 있는 거냐"고 재차 묻자, 답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중국은 10일 일본과 양자회담을 했습니다. 지난해 ARF이후 13개월 만입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일본과의 회담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라고 정부 당국자는 전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당국자는 "중국과 일본은 모두 실용주의적 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급속히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올 하반기에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중일 정상회담이 먼저 열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일본, 북한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지지를 얻고 있지만, 어느 순간 되려 우리가 고립되는 모양새가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3. 일본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

이번 ARF 기간 중에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습니다. 3국 외교장관 회담은 돌아가면서 호스트를 맡는데, 이번엔 우리나라 차례였습니다.

하지만 회담 장소는 존 케리의 숙소였던 '레이크 가든' 호텔이었습니다. 3국 외교장관들은 회담을 시작하기 직전, 나란히 서서 모두 발언을 했습니다. 케리가 가운데 서고, 왼쪽에 기시다, 오른쪽에 윤병세 장관이 섰습니다.

케리와 윤 장관이 먼저 발언한 다음, 기시다 외상이 마지막에 발언했는데, 윤 장관이 영어로 발언한 반면 기시다는 일본어로 얘기했습니다. 기시다의 말을 통역사가 순차 통역을 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외교장관이 영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다소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날 회담은 약 40분 정도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본회담에서도 역시나 기시다가 일본어로 하고, 순차통역을 썼습니다. 이 바람에 시간이 부족해 결국 서로 할 말만 하고 회담이 끝났다고 당국자는 전했습니다.

기시다가 영어를 쓰지 않는 건 그가 정통 외교관료 출신이 아니라 자민당 소속 정치인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출신으로 보면, 기시다의 외교에는 순수 외교의 논리보다는 국내 정치 논리가  더 많이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론 지난 번 바이든 방한 때도 여실히 느꼈지만, 한일의 국력에 따른 외교 여건의 차이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일본은 최근 한미일 공조라는 틀을 벗어나 북한과 독자적으로 납치자 문제를 논의하면서, 기존 동북아 외교의 틀을 흔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94년 이후 북핵에 대해 한미일 공조라는 틀이 20년간 유지됐지만, 정치인 출신 외교장관이 이끄는 일본 외교의 움직임에 따라 이 틀에도 변화가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4. 미국 존 케리 국무부 장관

이번 ARF에서 한미 회담과 한미일 회담은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일정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ARF가 개막하기까지 두 회담 모두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케리가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이라크 내전 때문에 일정을 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국무부 내에선 "케리의 일정은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결국 9일 한미 회담은 한 시간 정도 미뤄졌고, 같은 날 하기로 했던 한미일 회담은 하루 늦어졌습니다. 북핵 문제가 우리에겐 상당히 중요하고 시급한 이슈이지만, 미국 입장에선 지금 1순위는 아니라는 게 이번 회담 일정에서도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케리도 정치인 외교장관이지만, 힐러리와는 또 다른 캐릭터라는 전언입니다. 힐러리 같은 경우는 자신이 해야하는 메시지를 독서카드에 써와서 한장 한장 넘기며 회담을 진행하는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자기가 할 말을 빠뜨리지 않고, 회담도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편이라고 합니다. 우리 윤 장관 같은 경우도 준비해온 자료를 수시로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 가며 회담에 임합니다.

하지만 케리는  자료를 아예 보지 않고 회담한다고 합니다. 이번 한미일 회담도 마찬가지였다고 하고요. 그래서 외교 당국자로선 가끔은 뜬금없는 얘기를 꺼낼 때가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케리 장관은 한미일 회담 모두 발언에서도 북한 도발 문제 외에도 "중동, 가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3국이 공통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서 케리 장관은 중동이나 가자 관련 이슈에 대해 전혀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전해졌습니다.

즉, 실제 회담 내용과는 별개로 모두 발언을 통해 한미일이 북핵 외에도 가자지구나 이라크 문제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뉘앙스만 풍긴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통해 볼 때 케리 역시 정통 외교를 구사한다고 보긴 힘들 거 같습니다.

동북아 지역 정세는 격동하고 있습니다. 급부상하는 중국은 이제 미국과 대등한 G2의 입지를 굳히려 합니다. 일본은 미국의 그늘에서 이제 벗어나고자 합니다. 북한은 일본,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미국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난세 속에 우리나라는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면서 통일 여건을 마련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리수용, 왕이, 기시다, 케리, 윤병세...이들 외교 수장들 간의 복잡한 셈법과 총성없는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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