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근육이 녹을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을까

‘껌’과 ‘모자’에 대처하는 소통의 방식

[취재파일] 근육이 녹을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을까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껄렁껄렁한 녀석 하나가 수업 중에 껌을 씹었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이 갑자기 수업을 멈추고 야단을 치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 야! 너 입 안에 든 거 뭐야? 당장 껌 안 뱉어?
학생 : 싫은데요?

선생님이 뱉으라는 데, 뱉지를 않습니다. 되레 싫다고 말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살벌해집니다. 쥐죽은 듯 적막이 흐릅니다.

선생님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게 미쳤나? 너 이리 나와!
학생 : 선생님이 내가 껌 씹든 말든 뭔 상관인데요?
선생님 : 뭐? 지금 너 ‘내가’라 그랬어? 이게 죽을라고.

잔뜩 화가 난 선생님,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녀석을 때리기 시작하고, 녀석도 질세라 선생님 손목을 잡고 놔주질 않습니다. 그래봤자 15살, 어른을 이기긴 어렵습니다. 선생님한테 몇 분을 얻어터지고 나서야 녀석도 좀 수그러들었습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고 녀석을 교무실로 데려갔고, 한 시간의 엎드려뻗쳐와 열 장의 반성문을 읽은 뒤에야 화가 풀렸다는 후문입니다.

선생님이 껌을 뱉으라는 데 어떻게 안 뱉고 반항할 수 있을까, 당시 생각은 그랬습니다. 저렇게 버릇이 없을 수 있을까, 꽤 모범생 축에 들었던 제 입장에선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녀석이 선생님한테 대들었다는 것 자체를 대단하게 보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는 녀석이 큰 잘못을 했다는 데 이견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운 좋게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수가 영국 출신이었는데, 꽤나 보수적이고 꼬장꼬장했습니다. 유럽 교수는 민주적일거란 생각과는 달리 규율을 꽤 강조해서 학생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친구로 기억합니다. 이 친구가 수업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교수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교수 : 자네. 모자 당장 벗지?

그런데, 이 프랑스 친구, 그걸 못하겠답니다.

학생 : 나는 모자를 쓰고 싶습니다. 교수님이 상관할 바 아니죠.

10년 전 기억 때문인지, 제가 다 긴장했습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반항할 게 없어서 수업 시간에 모자 쓰고 싶다고 저러나, 그냥 벗지 왜 분란을 만드나 이해를 못했습니다. 역시 버릇없는 녀석은 세계 어디에나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꼬장꼬장한 교수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라습니다.

교수 : 나는 수업할 때 학생들의 눈을 보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눈을 보고 수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느끼고, 그걸 통해 피드백을 한다. 그런데 모자를 쓰면 그걸 느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거다. 네가 모자쓰길 고집하는 건 나의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다른 학생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만일, 모자를 벗을 수 없다면 다른 학생들의 수업권을 위해서라도 교실에서 나가라.

결국 그 프랑스 친구는 모자를 벗었고, 교수는 별 말 없이 곧바로 수업을 진행됐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 학점을 물어보니 그 수업에서 A를 받았더군요. 뒤에서 교수를 욕할지언정 앞에서는 교수를 깍듯이 모셨던 저보다 훨씬 높은 학점을 받았습니다. 그 일에 대한 보복은 당하지 않은 셈입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사례 모두, 출발점은 같았습니다. 학생은 교실에서 해선 안 된다고 규정된 행동을 했고, 교사는 그 행위를 통제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그 통제에 반발했을 때, 이에 대처하는 교사의 화법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첫 번째 사례의 화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이 껌을 씹는 행동 보다는 학생의 ‘말버릇’에 초점이 가있습니다. 교사의 체벌도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두 번째 사례의 화법은 논의가 계속 진행돼도 학생이 모자를 쓴 행동, 그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학생은 반발했지만, 교사는 설득했고, 학생은 교사의 설득을 받아들였습니다. 핀란드 사회에서 체벌이 없는 이유는, 아이들이 착해서도, 체벌 금지 규정이 강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교사가 일탈로 규정된 학생의 행동을 맞닥뜨렸을 때, 단순히 ‘위계’에 의탁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는 방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교사의 간접체벌로 근육이 녹는 ‘횡문근 융해증’에 걸린 학생 고등학생의 사연 전해드렸습니다.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800번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다가 사단이 났습니다. 우리 사회와 언론이 이 사건을 다뤘던 방식은 과도한 체벌, 잔혹한 행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가해 교사를 비난하는 의견부터, 극단적인 사례라며 교권 추락의 시대에 물 타기 하지 말란 항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숙제를 안했다는 이유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800번이나 시킬 수 있는 가혹함 그 자체보다도, 아이들이 왜 이걸 순순히 용납했는지 더 궁금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왜 이게 부당하다고 따져 묻지 않았는지, 왜 하라는 대로 했는지, 근육이 녹는데도 왜 끝까지 견뎌내며 벌을 받았는지, 차근차근 그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도착점은 우리 교실의 일방적인 소통 방식이었습니다. 따져 물었다간 반항한다고, 버릇없다고 책잡히는 우리 문화 말입니다. 결국, 이번 사건은 소통에 미숙한 우리 교실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적나라한 우화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소통 방식을 그대로 닮아가고, 아이들이 크면 우리 사회는 또 그렇게 소통합니다. ‘껌’으로 시작된 소통이 결국 ‘위계’의 문제로 도달되는 일련의 과정과, 과장님이 하라면 할 것이 뭔 사족을 다냐고 다그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합리적인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데 인색한 우리 자화상 말입니다. 되묻기만해도 태도의 문제를 걸고 넘어가는 엄격한 위계문화 말입니다. 결국, 까라면 까라, 이런 문화를 남자답다, 쿨하다 인정하는 건 소통 결핍에 대한 교묘한 위장술 아닐는지요. 그렇게 험한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조금은 답답한 건 저뿐인가요.

끝으로.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이번에 교사 분들께 항의 메일을 여럿 받았습니다. 요즘 애들이 어떤 줄 아느냐,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기사 쓰지 말란 얘기도 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체벌이란 행위는 교권을 담보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토대 같습니다. 왜 껌을 씹으면 안 되는지, 수고스럽더라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소통 방식이, 오리걸음보다는 교권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말,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기록으로 남아있다니 말입니다. 피해 학생 누나의 인터뷰 내용으로 갈음합니다.

“우리 어머니도 교사에요. 교사 집안이다 보니 그 누구보다 교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가해 교사에 대해 무작정 악감정만 갖고 상대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번 일 때문에 체벌이 논란이 된다고 해서, 교권이 약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잘못된 게 있으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교권을 위해서라도 맞는 것 아닐까요.”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