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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엘 시시 정권의 결단, 거센 후폭풍

이집트 정부보조금 축소가 몰고 온 혼란

[월드리포트] 엘 시시 정권의 결단, 거센 후폭풍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칼을 빼 들었습니다. 뭔고 하니 그 동안 가스와 휘발유 같은 에너지 분야에 지원하던 정부보조금을 대폭 축소한 것입니다. 보조금 삭감은 곧바로 가격 인상을 뜻합니다. 당장 휘발유 가격이 80% 가까이 올랐습니다. 천연가스도 70%, 디젤 60%까지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이미 전기 요금도 인상됐습니다. 더 나아가 담배세와 주류세 (이집트도 이슬람국가지만 자국 맥주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권에서는 나름 술에 대해 관대한 나랍니다.)도 대폭 인상하기로 했습니다. 리터당 우리 돈 280원정도 하던 휘발유 가격이 400원 정도로 인상됐고 리터당 160원하던 경유는 280원으로 뛰었습니다.
 
정규진 취재파일용
                           <6월 8일 취임식을 가진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
 
“아이고 그래도 우리로 치면 생수 한 병보다 기름값이 더 싸네” 라고 웃을 수 있겠지만 4년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나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했다는 대졸자 초임 연봉이 기껏해야 우리 돈 30만원인 이집트 인건비를 생각하면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휘발유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3000원으로 뛰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정규진 취재파일용
                         <기름값 인상 하루 전인 7월 5일 주유를 위해 몰려둔 차량 행렬>

무엇보다 이집트에선 정부 보조금이 서민의 생계유지에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입니다. 이집트는 전체 인구의 40%가 하루 2달러도 못 버는 극빈층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들 서민들이 어떻게 1파운드(우리 돈 150원정도)도 안 되는 돈으로 한끼 배를 채울 빵을 살수 있을 것이며 1파운드만 내면 승합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집에서 무료로 씻고 밥을 짓고 기껏 10파운드(1500원)도 안 되는 돈을 내면 한달 내내 가스를 마음껏 쓸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다섯 중 둘은 극빈층인 상황에서 이들의 생계를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는 수십 년째 이어지는 이집트 정부의 숙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사르 – 사다트 - 무바라크로 이어지는 철권 통치자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의식주에 필수적인 에너지 분야에서 정부보조금을 늘려왔고 그 부담이 오늘날 산더미 같은 재정적자로 이어진 겁니다.
정규진 취재파일용
             <카이로 쓰레기마을 무가탐 어린이, 이집트인의 40%가 하루 수입 2달러가 안 되는 극빈층>

이렇게 곳곳에 숨어 있는 에너지 보조금은 어느덧 정부 재정 지출의 5분의 1을 차지하게 됐고 이집트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GDP(국내총생산)의 12%를 육박하게 됐습니다.  에너지 보조금이 전체예산의 20%를 넘으면 사실 인건비나 경직성 경비를 제외하면 새로운 분야에 쓸 돈은 전혀 없다고 한 경제전문가가 쓴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결국 마흐라브 이집트 총리가 “에너지 보조금을 줄이지 않는 건 범죄행위”라고 선언하면서 극단적인 보조금 감축을 시행했습니다. 가스와 석유, 전기 분야에서 평균 50%정도의 급격한 가격인상이 단행되면서 그 여파가 그야말로 스나미처럼 이집트 전역을 휘덮고 있습니다.

택시비와 버스비를 시작으로 모든 물가가 며칠 만에 20%이상 치솟고 있습니다.. 택시기사들은 아예 택시의 미터기를 꺼버리고 가격을 흥정해 손님을 태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택시기사와 승객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승합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한 직장인은 하루 4파운드(600원)을 내면 됐는데 이제는 8파운드(1200원)을 내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카이로 외곽 이스말리아에선 택시기사들이 택시로 주정부청사 길을 가로막은 채 기름값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정규진 취재파일용
                  <카이로 외곽 이스말리아에서 주정부청사 도로를 가득 메운 택시 시위>

기름값 인상은 생필품 가격 인상으로 여과없이 이어집니다. 이집트 상공회의소는 생닭 가격이 보조금 삭감 이후 겨우 며칠도 안돼 물류수송비를 이유로 25%가 상승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장 25%의 가격인상을 목격하는 상황에서 이런 추세라면 올해 연말에는 40%까지 생필품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 전문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연히 서민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3000파운드(우리 돈 45만원)의 월급으로 다섯 식구를 부양하는 제 이집트 지인은 당장에 생활비가 4000파운드는 필요할 것 같다며 생계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 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엘 시시 대통령이 2년 뒤에는 이집트인의 삶의 질이 반드시 나아질 것이며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물가를 원상대로 회복시키겠다고 말했지만 이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카이로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으로서 과연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서 이런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했는지, 또 과연 에너지 보조금이 재정적자의 원흉인지, 재정적자의 요인은 비효율적인 정부정책의 오류가 주범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며 정부의 조치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여론이 비딱하게 돌아가자 엘 시시 정부는 부랴부랴 군대 버스를 출퇴근시간에 투입하면서 불만을 다스려보려고 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크지 않아 보입니다.

정부 보조금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주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전 세계 어디에도 통용되는 고민거립니다. 부자들에게는 몇 푼 안 되는 보조금을 주고 안 준다고 해서 피부로 느끼지도 못 할 것이지만 정말 하루 벌어 하루를 버텨야 하는 서민들에겐 보조금 삭감은 곧 생계 곤란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극단적이고 가파른 축소 정책의 충격파는 이집트 경제 전체에 급격한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무상급식이니 무상보육이니 하는 문제로 비슷한 논쟁을 겪었던 우리나라와 비슷한 이야길 겁니다.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이집트인이라면 정부보조금이 재정난에 골칫거리라는 점과 보조금 축소를 통한 재투자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계를 무시한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선 이해를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수의 부자, 소수의 부정축재 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 대신 손쉽고 힘없는 절대 다수의 서민에게 경제난 해결의 고통을 나눠지라는 태도는 군부독재라는 꼬리표를 달고 태어난 엘 시시 정권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드러내는 단면으로 생각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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