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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다가오는 진실의 순간, 그런데 우리는…

[월드리포트] 다가오는 진실의 순간, 그런데 우리는…
지난해 초 영화 ‘신세계’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배우 이정재가 분한 주인공은 조폭이면서 경찰입니다. 정확히 말해 조직폭력 집단을 감시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잠입한 경찰이죠. 주인공은 오랜 조폭 생활 끝에 계파 두목의 오른팔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리죠. ‘나는 조폭인가? 경찰인가?’
경찰과 조폭 두 집단이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면서 세력 균형을 이룰 때는 모호한 줄타기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조폭의 우두머리가 숨지고 경찰이 해당 조폭을 좌지우지 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주인공은 점차 선택의 압력을 받게 됩니다. ‘너는 조폭이냐, 경찰이냐, 정체를 밝혀라.’ 진실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외교 현실을 보면 영화 ‘신세계’의 주인공이 떠오릅니다. 우리나라 외교에도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외교적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모두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중국인만큼 1992년 수교 이후에도 우리와 미국의 관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이런 틀에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대중 관계의 비중이 급속도로 커졌습니다. 무역을 비롯한 경제적 관계가 눈부시게 성장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급기야 ‘균형자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선언에 대미 관계는 차갑게 식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이런 기조를 일거에 뒤집습니다. 철저한 친미 외교로 미국과는 개선을 넘어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관계를 만듭니다. 대신 중국과는 껄끄러워졌습니다. 연평도 사태 이후에는 한중이 전례 없이 날 선 외교적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대미와 대중 관계는 이렇게 반비례 곡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개인적 인연에, 주변 상황까지 맞물려 두 나라 모두와 좋은 관계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센가쿠, 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는 중국에게 한국은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할 대상입니다. ‘아시아로의 회귀’를 외치며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한국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큰 중요성을 느낍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우리는 세계 양강, 모두로부터 우호적인 태도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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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행복한 줄타기는 종료 시한을 앞두고 있습니다. 진실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사드(THAAD), 즉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그 방아쇠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주한미군은 사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 세트에 2조 원이나 하는 무기를 공짜로 배치해주겠다니 우리로서는 ‘땡큐’일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무료 증정이 아니라 일정 기간 사용 경험을 한 뒤 강매를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측은 이미 2010년부터 각종 전략 보고서를 통해 이런 의도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미국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지 기로에 서있습니다.
단순히 막대한 돈을 들여 사야하기 때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드 배치는 사실상 미국의 TMD, 전장 미사일 방어 체계에 우리나라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9년 이미 미국의 TMD 참여를 거부한 바 있습니다. 당시 천용택 국방장관이 밝힌 이유는 -주변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고 -한국의 경제력이나 기술력에 걸맞지 않고 -북한 미사일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서의 효과도 의문시되기 때문입니다. 말이 좀 어렵죠? 쉽게 풀어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중국이 우리의 MD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고, -미사일 방어 체계 비용이 너무 비싼 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술적 이익은 거의 없으며, -북한과 같이 짧은 거리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요격 확실성이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MD 참여에 반대하면 들었던 이유는 지금 현재까지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중국의 반발 가능성과 그로 인한 우리의 곤혹스러움은 더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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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국은 왜 그렇게 MD에 반대하는 것일까요? 사드나 MD가 도입될 때 우리나라에 설치될 고성능 레이더가 핵심 요인입니다.
사드의 경우 AN/TPY-2가, MD의 경우 X밴드 레이더가 들어옵니다. 전자는 이동형 레이더로서는 세계 최고 성능을, 후자는 무려 반경 4천8백 킬로미터 내의 모든 탄도 미사일을 조기 경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신장과 시장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역의 미사일이 미군의 감시권 안에 들어오는 셈입니다.
중국으로서는 가뜩이나 핵탄두 수나, 전달 무기 체계에서 미국에 한참 뒤지는데 자신들의 코앞에 MD까지 설치돼 핵미사일이 무용지물로 될 경우 미군과의 핵전력에서 비교조차 안될 만큼 기울어지는지라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를 MD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 전초 단계로 사드를 마음대로 갖다놓겠다고 합니다. 중국은 이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신호를 강력히 보내고 있습니다. 양쪽 다 만족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외줄에서 어느 한 쪽으로 내려와야 하는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0세기까지는 이런 상황에서 고민할 여지도 없습니다. 미국의 손을 번쩍 들어주면 그만입니다. 당시 우리 안보나 국제 외교, 경제적 상황에서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가 최우선시 됐습니다. 그런데 현재는요?
중국은 우리나라 제1의 교역국입니다. 경제적 관계의 중요성은 이미 미국을 넘어선지 오래입니다. 북한 핵문제를 비롯해 대북 관계를 풀 수 있는 열쇠도 중국이 쥐고 있습니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 상황에서 중국과 협조할 일은 늘기만 합니다.
우리는 진실의 종을 울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고통들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최대한 진실의 순간을 뒤로 미뤄야 합니다. 가능하면 오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각종 외교적 현안들을 기술적으로 조합해 우리의 선택이 가져다줄 중국과 미국의 불만을 최대한 낮춰야 합니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철저하게 계산하고 지혜롭게 처신해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보 수뇌부에 이런 어려운 과제를 풀어나갈 능력이 있느냐는 점입니다. 다른 것은 따질 것도 없습니다. 안보 사령탑이라 할 수 있는 국가안보실장의 면면만 봐도 걱정에 휩싸입니다. 전임 김장수, 신임 김관진 실장 모두 군 출신입니다. 평생 전쟁을 연구하고 공부한 인물들입니다. 외교 안보 문제에 있어 강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전시 작전권마저 넘겨준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친미적이기 마련입니다. 이미 줄타기에서 한쪽으로 잔뜩 기울어진 셈입니다.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습니다. 행정부를 총괄할 총리 후보의 사상입니다. 문창극 후보는 한 강연에서 “6.25 이후 미국이 베푼 은혜를 잊는다면 인간도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는 미국에 대해 "로마 이후 지구상에 많은 제국이 있었지만 미국만큼 아량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나라끼리 동맹국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미국과 동맹을 끊는다면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과 동맹을 할 것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쯤 되면 친미 사대주의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인물이 앞서 말한 민감한 시기에, 어려운 국면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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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이미 역사적으로 무수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어쩔 수 없이 사대를 하고, 외교적 타협을 하며 생존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고, 철저히 국익만 생각할 때는 어려운 위기를 잘 헤쳐 나왔습니다. 반대로 자주성을 잃고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버렸을 때는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교훈만 머리와 가슴에 품고 있다면 진실의 순간과 맞닥뜨려야 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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