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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애증 교차하는 중-러 '新밀월시대'로

[월드리포트] 애증 교차하는 중-러 '新밀월시대'로
중국 베이징의 외교가에는 거의 세계 대사관들이 몰려 있습니다.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국제 사회의 양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국이다보니 강대국 대사관들은 대부분 으리으리 합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대사관은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집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종합대학 캠퍼스만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간단치 않은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첫 만남은 악연이었습니다. 1580년대부터 옛 러시아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동진에 나섰습니다. 1640년에는 이미 태평양 연안에 다다릅니다. 그러더니 자원이 풍부하고 주민이 많은 헤이룽강 일대로 몰려들었습니다. 1651년에는 쑹화강까지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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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청나라와 이들은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머리털이 노랗고 피부색이 하얀, 낯선 색목인들은 이전에 중국과 접촉했던 색목인과 달랐습니다. 우수한 성능의 총과 대포로 당시 청나라가 자랑하던 철기병을 번번히 격파했습니다.

다급해진 청나라는 조선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조선은 당시 두 번의 왜란에서 조총에 호되게 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총포 기술을 상당히 발전시켰습니다. 게다가 효종이 추진하는 북벌운동에 힘입어 군의 훈련 상태도 우수했습니다. 조선의 조총 부대는 1654년 1백명, 1658년 2백명이 출동해 청나라 군대와 합동 작전을 벌였습니다. 1, 2차 나선 정벌입니다. 조선 조총군의 맹활약 덕분에 헤이룽강 유역에 들어왔던 러시아인들은 모두 쫓겨났습니다. 1689년 표토르 대제는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스타노보이 산맥을 경계로 국경을 정했습니다.

이후 두 나라는 큰 분쟁없이 비교적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침탈이 본격화되자 러시아도 숟가락을 들이댔습니다. 청나라 팔을 비틀어 몽고와 아무르강(헤이룽강) 유역과 연해주를 빼앗았습니다. 지금의 국경선은 이때 결정된 셈입니다. 이밖에도 중국 동북부 지역의 각종 이권사업을 차지했습니다. 러시아가 지금까지 중국인들에게 '비호감'으로 남게 된 이유입니다.

1917년 공산 혁명과 이어진 소련의 성립은 두 나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놨습니다. 국내 사정이 급해진 러시아, 소련은 중국내 이권에서 대부분 손을 뗐습니다. 그 공백은 일본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소련은 중국의 혁명가 양성을 위한 요람 역할을 합니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신중국 지도자의 상당수가 모스크바 중산 대학 등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라이벌이었던 장제스, 장징궈 타이완 총통 부자 역시 소련 유학파라는 점입니다. 거꾸로 마오쩌뚱 중국 주석은 소련에서 교육 받은 적이 없습니다.

소련은 중일 전쟁 기간 중에도 중국의 가장 강력한 우방이었습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의 홍군, 나중의 인민 해방군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각종 무기와 군사 훈련, 군자금의 젓줄 노릇을 했습니다. 이후 국공내전과 한국에서의 6.25전쟁까지, 중국과 소련은 세계 유이의 자발적 공산국가로서 냉전시대 혈맹으로 뭉쳤습니다.

하지만 1953년 스탈린의 죽음과 3년 뒤 후루시초프가 주도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중소의 밀월관계에 파열음을 부릅니다. 중국은 후루시초프를 수정주의자로 강력히 비난하면서 소련과 이념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는 멀어지다 못해 찬바람까지 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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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1969년 우수리강의 전바오섬 영유권을 놓고 무력 충돌을 빚습니다. 그해 3월 벌어진 전바오섬 탈환전으로 중국과 소련 모두 수천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습니다. 그해 8월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변경에서도 양국 군이 충돌했습니다. 한때 중국군 81만 명이, 소련군 66만 명이 중소 국경에 진주해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소련은 핵무기를 준비하기까지 했습니다.

1969년 9월 소련 코시 수상이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양측은 겨우 외교적 해결의 실마리를 잡습니다. 다만 양측 모두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아 국경을 둘러싼 갈등은 이후에도 2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이 와중에 중국은 소련을 견제하려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섭니다.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을 찾아와 마우쩌뚱 중국 주석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1979년에는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이 기간 소련과는 소 닭보듯 했습니다.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당서기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습니다. 1989년 양국은 관계를 다시 정상화했습니다. 1991년에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해묵은 국경 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했습니다. 1992년에는 러시아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고 1994년에 장쭤민 중국 주석이 러시아를 공식 방문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해빙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그래도 앙금이 남았습니다. 특히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경제, 외교적으로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러시아는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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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옛 애인과의 사랑이 다시 뜨겁게 불타오르는 형국입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도, 중국 왕이 외교부장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국-러시아 관계가 이보다 좋은 적은 없었다." 새로운 밀월시대입니다.

다 식었던 이들의 사랑에 다시 불을 붙여준 매개는 무엇일까요? 미국에 대한 미움입니다. 중국은 '아시아로의 회귀'를 추진하는 미국과 부쩍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동중국해 방공식별 구역 설정이나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 등에서 미국은 사사건건 반대편을 듭니다. 겉으로는 신형 대국 관계를 받아들여주는 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계속 견제구를 던집니다. 중국은 속이 끓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을 세게 들이 받았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유럽을 부추겨 러시아 왕따에 나섰습니다. 푸틴 대통령을 공공연히 '돌아이' 취급합니다. 미국의 옛 라이벌과 장래 라이벌은 자연스럽게 서로 손을 잡게 됐습니다.

지난 20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아시아 교류 및 신뢰회복 회의', 즉 CICA(시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애정 행각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유럽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로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대폭 줄이려 하자 중국인 새로운 시장으로 선뜻 나섰습니다. 러시아로부터 무려 4백조 원 넘는 천연가스를 공급받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정상은 함께 내정 간섭에 반대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크리미아를 병합하든, 남중국해의 패권을 잡든 제3자인 미국은 빠져라'는 것입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CICA 기조연설에서 이 회의를 아시아 안보협력 기구로 격상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국가 연합 기구를 내세워 미국의 간섭을 막자는 의도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바로 쌍수를 들고 환영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기구는 필수적입니다." 죽이 척척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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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의 이번 밀월 관계는 얼마나 오래 갈까요? 한쌍의 남녀 사이도 오늘과 내일이 다른데 하물며 거대한 국가간의 관계를 어찌 쉽게 예측하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밀월 시대가 꽤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미국이라는 확실한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힘에 맞서기 위해 중·러는 서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일본, 유럽과의 동맹 강화로 맞대응할 태세입니다. 다시 냉전 시대의 역학 구도로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냉전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중국과는 서로 제1의 교역국입니다. 경제적으로, 이제는 정치·외교적으로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러시아 역시 우리의 주요 교역국입니다. 러시아로부터 상당한 양의 원유와 가스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물론 러시아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마냥 줄서기식 외교가 불가능합니다. 명분과 실리가 얽힌 복잡한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줄 서는 데에만 익숙한 우리 정치, 정부 지도자들이 이런 복잡한 상황을 극복할 소양과 역량이 있는지 많이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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