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선생님의 아버지는 딸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사고 다음날 아버지 품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보기에 딸은, 그저 잠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흘이 지나 발인하던 날, 영정 속에서 차분히 웃고 있었습니다.
4월 23일 아버지는 안산 임시분향소에 딸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습니다. 딸이 출퇴근하던 학교와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곳입니다. 아버지는 그 동네를 이렇게 매일 드나들 줄 몰랐습니다.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어떤 날은 그것보다 더 자주 딸의 얼굴 앞에 섰습니다. 설 때마다 매번 아버지는 무너졌습니다. 이름을 부르다가 화환으로 허리가 푹 고꾸라졌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흘러서 손수건을 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다가 지칠 때도 너무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른 가족도 생각해야지.’ 자리를 떠야할 땐 오른손을 반쯤 들어, 간다고 손짓했습니다.
딸의 납골당은 경기도 화성에 있습니다. 차로 거길 찾는 게, 눈뜨면 처음 하는 일이 됐습니다. 운전하면서 아무것도 안한다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그저 운다고 합니다. 딸 얼굴을 보고, 다시 차를 몰고 분향소로 오면 하루가 제법 지나간다고 합니다.
울다가 차 속도를 줄여야할 때면, 창밖에 젊은 아가씨밖에 안 보인다고 했습니다. 젊은 아가씨가 모두 딸처럼 보여서 또 운다고 했습니다.
딸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따라서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3반은 39명입니다. 제자 31명이 희생됐거나 실종상태입니다. 분향소에서 영정을 보고 나온 뒤에는, 빈소를 찾아 일일이 조문했습니다. 선생님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학부모들을 만나 먼저 딸을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딸이 살아서 돌아왔다면, 마땅히 했을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딸의 교사 인생에서 처음 만난 학부모 앞에서 아버지는 사죄하고, 위로했습니다.
“담임이었는데 학생들을 많이 구조하지 못해 그 점에서 미안하게 생각해요.”라며, 한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많이 좀 구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해서 우리 유가족 부모님들한테는 굉장히 미안하다.”라고 수없이 말했습니다.
딸은 26살인 올해 처음 교단에 섰습니다. 공주대학교 사범대 07학번.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수업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한” 딸이었습니다.
지난달 말 어느 날은, 남자 대학생 몇몇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딸의 대학 후배들이었습니다. 학교에 분향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딸의 또 다른 사진을 영정으로 내줬습니다.
딸의 캠퍼스 빈소엔 사흘간 문상객이 다녀갔습니다. 공주대 사대 학생회와 스스로 참여한 학생이 상주였습니다. 학생들은 유족과 딸을 위한 조의금을 따로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영정을 돌려주며, 조의금이 든 상자도 함께 건넸습니다. 아버지로선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유족들과 상의했습니다. 유족에게 모인 조의금은 270만 원 정도였습니다. 이 돈은 단원고에 장학금으로 전했습니다. 기부자는 공주대 사범대 학생회였습니다. 학교를 찾아 이런 의사를 전하며, 아버지는 마음이 또 한 번 무거웠습니다. 장학금은 저소득층 학생의 수업료를 대신 내는 데 쓰일 거란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딸과 함께 지낸 학생 가운데는, 한 학기 수업료를 못 낼만큼 형편이 어려운 아이도 많았던 겁니다.
나머지 딸 앞으로 모인 조의금은, 공주대학교에 장학금으로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뭉클하면서도 미안했다고 했습니다. 백만 원이 조금 넘은 이 조의금에, 자신에게 들어온 조의금을 더해 기부를 마쳤습니다. 용돈도 모자란 후배 대학생들이 남긴 정성은 천원과 오천 원짜리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스무 곳 가까운 빈소를 다니며, 아버지는 숨진 단원고 아이들의 시신도 자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는 것처럼 눈을 꼭 감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 제 자식 같더라고요. 다들 예쁘던데 엄마 아빠는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세월호 선장과 부하들이 밉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미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정말 미워요.” 경상도 사투리로, 쉰 목소리로 원망이 새어나왔습니다.
화성에 있는 납골당엔 2학년 3반 아이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곳에 16명이 모였는데 하늘나라 가서도 같은 반 학생들하고 마음껏 뛰어 놀고, 즐겁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좋은 데 가서.”
숨진 단원고 김 모 교사의 아버지는 스스로 보도를 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 요청에 응해 저를 만났고, 질문에 답해주시고 정중하게 한 가지를 요청했습니다. 딸과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시골에 계신 김 교사의 할머니가 아직 사고 사실을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손녀가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세월호에 탈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근황은, 요청한 내용을 담아 지난 17일 8시 뉴스에 보도했습니다.
[취재파일] 떠난 선생님처럼…딸의 빈자리 채우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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