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들은 병풍?
15일 아침, 국정원에 도착했습니다. 분주한 기자들 앞에 국정원 대변인이 나섰습니다. "원장님이 3분 정도 대국민 사과문을 읽으실 겁니다.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황당했습니다. 여러 기자들이 항의했지요. "그럴 거면 기자들을 뭐 하러 불렀나. 이 많은 기자들이 들러리인가?" 일부는 언성도 높였습니다. 그러나 대변인은 같은 대답만 반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질문하지 마세요."
오전 10시. 남재준 원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요란한 플래시 소리가 이어지더니,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굳은 표정의 남 원장이 연단 옆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또 한 번 플래시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남 원장은 준비해 온 사과문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쉴 틈 없이 읽었습니다. 사과문을 읽는데 정확히 3분 걸렸습니다. 남 원장은 목례를 하고는 퇴장할 채비를 했습니다.
■ 기자는 <질문하는 사람>
질문을 할지 말지는 기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무례하지 않게, 예의를 갖춰 질문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기자의 일이고, 기자가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답변할지 말지는 남재준 원장이 판단할 일입니다. 애당초 기자들 앞에서 공개 사과할 요량이었다면, 질문 한 두개 쯤 못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 사과가 <진심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남재준 원장에게 그 정도의 양식은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손을 들고 물었습니다. "원장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사퇴는 안 하십니까?"하는 질문을 할까도 고민했지만, 질문의 '모양' 보다 답변의 '내용'에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참았습니다) 설사 질의응답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히더라도, 그 이유만이라도 직접 해명하길 바랐습니다. 국정원 실무자들이 주제 넘게 호들갑을 떤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남재준 원장은 저를 흘끗 노려보고 그대로 나갔습니다. 짧은 시간,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많은 것들이 읽혔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의 호들갑이 아닌 게 증명된 셈이죠. 수십 명의 취재진이 남재준 원장을 대면한 시간은 5분이 채 안 됐습니다. 밤늦은 시간 급박하게 기자들을 불러 모은 이유가 짐작 되십니까? 국정원은 사과의 <내용>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저 사과하는 <모양>을 만들려고 했을 뿐이죠. 사과의 진정성은 반드시 태도에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사과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 부하 내보내고…<사퇴> 대신 <사과>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이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세금 수 천만 원을 문서 위조하는데 썼습니다. 국가기관의 활동이라 하기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사법사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윤갑근 검사장의 말입니다.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국가기관의 신뢰훼손은 물론이고, 외교 문제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일이다.”
수개월간 조직적으로, 공금을 사용해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조작된 증거로 검사들을 우롱하고, 법원을 능멸했습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주적인 북한조차 대한민국 정부를 비웃습니다. 대통령과 국민들 얼굴에 먹칠을 했지요. 목숨 걸고 정보활동을 해 온 사람들은 국정원의 헛발질에 만신창이가 됐고, 국정원을 도왔던 한 탈북자는 국정원의 언론플레이에 딸의 처형을 걱정하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형편없는 수사 실력은 물론이고, 도덕 수준도 엉망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남재준 원장이 증거 조작에 대한 보고를 받았든 못 받았든, 이번 사건은 사과로 그칠 수 있는 수준을 지나쳤다고 봅니다.
자신보다 늦게 부임한 부하 직원 하나 옷을 벗겨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올곧은 군인이었다 자부하는 남재준 원장에게, 직접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원장님께서는 평생 <명예>와 <책임>을 강조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제 부하가 책임을 지고 그만뒀는데요, <사퇴>가 아닌 <사과>를 선택하신 것이 혹시 부끄럽지는 않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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