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을 주장했다 권좌에서 밀려난 '비운의 지도자'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25주기(4월 15일)를 맞아 그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과의 인연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후야오방은 정치개혁을 추진하다 실각함으로써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도화선이 된 인물로 그 이후 중국 역사에서 냉대를 받아왔다.
중국 뉴스포털사이트인 텅쉰망(騰訊網)은 15일 후야오방과 후진타오의 인연을 소개하는 기사를 인민망과 중국 잡지, 홍콩 언론 등을 인용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 사이트는 중국 광둥(廣東)성 당위원회 당사 연구실이 발간하는 잡지 '홍광각'(紅廣角) 2010년도 판에 '후진타오와 후야오방 두 총서기 간의 미담'이란 글이 실려 두 사람 간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소개됐다고 전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야오방은 중일 청년우호교류 행사를 기획, 일본 청년 3천 명을 톈안먼 광장으로 초대했다.
당시 이 행사를 실무적으로 담당한 사람이 바로 후진타오였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서기처 서기였던 후진타오는 그해 4월 후야오방을 수행해 후베이(湖北)성 시찰에 나서기도 했다.
1993년 4월 정치국 상무위원이던 후진타오는 장시(江西)성의 후야오방 묘소를 찾아 금기를 깨는 발언을 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현장의 중앙과 지방간부들이 누구도 감히 후야오방을 총서기라고 부르지 못했던 상황에서 후진타오는 "후야오방 총서기"라고 칭함으로써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이 자리에서 "내가 공청단 업무를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내 마음은 늘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의미심장한 발언도 했다.
후진타오는 1998년 5월 한 좌담회에서 금기를 또 깨뜨렸다.
중국 공산당의 이른바 '진리표준'은 후야오방이 만든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사람이 없을 때 후진타오는 "진리표준은 후야오방이 만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 탄생 90주년이던 2005년 춘제(春節·음력설) 때 중난하이(中南海)를 빠져나와 후야오방의 부인 리자오(李昭)에게 세배까지 했다고 한다.
후야오방은 9년간 총서기를 지내면서 지방 시찰을 자주 다녔는데 방문지에는 후진타오가 당서기를 맡았던 구이저우(貴州)성도 포함됐다.
후야오방이 1986년 4월 구이저우를 시찰할 당시 찍은 사진에는 젊은 시절 후진타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후진타오는 지난 11일 후난(湖南)성 류양(瀏陽) 중허(中和)진에 있는 후야오방의 고택과 기념관을 방문해 동상에 절을 하는 등 극진한 예도 표시했다.
후야오방은 중국 개혁개방의 선구자 그룹의 핵심 일원이면서도 1987년 공산권 몰락 위기 속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축출됐으며 1989년 4월 15일 그가 사망하면서 톈안먼 사태가 촉발됐다.
학생, 지식인들의 후야오방에 대한 복권·재평가 요구가 광범위한 민주화 요구 시위로 번졌고 비극적인 유혈 진압 사태로 마무리된 것이다.
현재 후야오방의 복권은 공식적으로는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후야오방에 대한 관련 기사와 추모글은 과거에 비해서는 통제가 다소 느슨해지는 모양새다.
중국과 홍콩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글들이 조심스럽게 올라오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금기 깬 후진타오 "후야오방은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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