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청계천 인근의 한 도로변.
이곳에는 냉장고 크기의 스티로폼 박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인근 공구상가에서 내다 버린 상자 같은 이 스티로폼 안에 20일째 사람이 살고 있다.
언뜻 보면 노숙인이 머무는 곳 같지만 박스에 "나는 노숙인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큰 글씨로 쓰여 있다.
주인은 지난 2월 발생한 화재로 수십년간 살던 집을 잃은 화교사옥 쪽방 주민 나경수(46) 씨다.
3일 중구청과 수표교 대책위원회 등에 따르면 최근 중구가 화교사옥 주민에 대한 임시 주거비 지원을 중단하면서 갈 곳을 잃은 주민이 하나 둘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중구는 화재로 집을 잃어 당장 갈 곳이 없는 주민을 위해 한 달간 고시원 비용을 지원했지만 더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추가 지원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화교사옥에서 수십년 살아온 주민 17명은 대부분 1970∼1980년대 대만 화교들에게 수백만원의 돈을 주고 집을 샀다고 했다.
주민 상당수는 당시 공식 체결한 매매계약서도 갖고 있고 전입신고까지 돼 있지만, 토지 소유주인 주한 대만대표부가 건물을 수십년간 무허가로 방치한 탓에 상황이 여의치 않다.
지난 2월 불이 나면서 붕괴 위험이 커진 화교사옥이 대부분 철거됐지만 무허가 건물에 살아왔다는 이유로 거주민은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나 씨 가족이 화교사옥에서 살기 시작한 건 1974년 나 씨가 여섯 살 때였다.
어머니가 한 화교에게서 집을 샀고 이듬해 3월 전입신고를 했다고 전씨는 전했다.
화교사옥 쪽방은 어머니와 7명의 남매가 살기에 비좁았고 살림살이도 풍족하지 못했지만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어 행복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나 씨는 결혼과 함께 화교 사옥을 떠나 경기도 성남에 가정을 꾸렸지만, 아내와 이혼 후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고 방황하다 10여 년 전 어머니가 계신 화교사옥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에서 재기를 꿈꿨다.
하지만 2월 화재로 집마저 빼앗겼다.
다행인 건 화재 발생 전에 어머니가 나 씨에게 쪽방을 내주고 다른 형제의 집으로 옮겨 화를 피한 것이었다.
현재 나씨가 거주하는 스티로폼 집은 나씨 표현대로 '관'처럼 생겼다.
높이 90cm, 길이 180cm 남짓으로 철거 과정에서 나온 스티로폼을 걷어 직접 만든 것이다.
한 명이 겨우 누울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지만 상가 건물의 전기를 끌어와 전기장판과 전기스탠드도 켤 수 있다.
나무젓가락을 벽에 꽂아 옷걸이도 만들고 벽면을 파 수납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곳곳에 나씨의 꼼꼼한 손길도 묻어났다.
나 씨는 "밤에 누워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 소리를 듣고 있으면 차가 날 덮칠 것 같은 생각에 두려울 때가 많다"며 "취객들이 발로 차고 다니는 경우도 많아 박스 겉면에 '난 노숙인이 아니다'라고 글씨도 크게 써놨다"고 말했다.
이틀 전에는 나씨의 스티로폼 집 옆에 이웃도 생겼다.
구청이 내주던 고시원 비용을 대신 내지 못한 주민이 나씨 옆에 또 다른 스티로폼 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런 스티로폼 집이 얼마나 늘어날지 예상하기 어렵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30여년간 화교사옥에서 남편과 살아오다 화재로 집을 잃은 한 할머니는 한 달 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나라가 이대로 우리를 모른 척할 리 없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할머니는 일주일 전부터 서울시청 인근에서 시에 이주 대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중구 관계자는 "화교사옥은 안전관리가 되지 않아 2000년대 초반부터는 가급적 이곳에 전입신고를 하지 않도록 유도해 왔다"며 "무허가 건물에 살던 주민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지원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결국 거리로…스티로폼에 몸 맡긴 화교사옥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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