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치는 사람에게는 삶의 벌이 따른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 동독을 찾은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개혁을 거부하는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이때만 해도 불과 1개월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11개월 후 동서독이 통일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독일 통일이 베를린 장벽 붕괴가 가져온 돌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는 시각이 적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독일 역사학자들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 이후 지속해온 동방정책으로 통일의 터전이 마련됐다는 점을 중시한다.
또한,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동유럽에 변혁의 물꼬를 트자, 서독 정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속한 결단과 대응에 나선 것이 통일을 이룬 비결로 분석한다.
◇동유럽 변혁의 물결에 무너진 철의 장막 1989년 7월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동독 시민 혁명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앞서 1개월 전인 6월 폴란드에서 레흐 바웬사 자유노조가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유럽 국가에서 처음으로 비(非) 공산 민주정권을 탄생시킨 것이 자극이 됐다.
헝가리는 그해 9월 동독 탈출자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 '철의 장막'에 처음으로 구멍을 냈다.
동독 공산당은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호네커를 물러나게 하고 그의 심복인 에곤 크렌츠를 후임 서기장으로 내세웠으나, 11월 5일 동베를린에서 무려 100만명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서독 국경이 열렸다.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1989년 11월 29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연방 하원에서 통일 방안 10개항을 발표한다.
당시 콜 총리는 독일 통일이 5년에서 10년 가량 걸릴 것으로 내다봤으나 동독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악화하자 신속한 통일로 방향을 선회했다.
◇속전속결로 이뤄낸 평화 통일 여행 자유화 조치에도 동독 주민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1989년부터 1990년 3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동독인구 1천640만명의 3.2%인 52만9천명이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밀려들어왔다.
콜 총리는 1990년 2월 7일 동독 정부에 화폐·경제·사회 통합 조약 체결을 제안, 5월 18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독 주민의 탈주 행렬을 막았다.
콜은 이와 함께 그해 2월 20일 소련을 방문해 고르바초프로부터 독일 통일을 약속받는다.
이는 당시 동독내에 34만명의 소련군이 주둔했음에도 평화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동독이 3월 18일 실시한 총선에서 우파인 기독교민주당(CDU)의 드 메지에르 총리가 선출된 후 통일을 위한 행보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동서독은 5월 5일 4대 전승국인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이 본에서 `2+4 회담'을 구성, 이를 통해 통일 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잔류, 폴란드와 국경선 확정, 독일 군 감축 등 대외 걸림돌을 해결하고 8월 31일 통일조약에 서명한다.
통일 조약은 9월 20일 동서독 의회에서 비준되고 10월 3일 독일은 분단 45년만에 다시 하나의 국가로 합쳐진다.
서독 내무장관으로 통일을 주도했던 볼프강 쇼이블레 현 재무장관은 2009년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만일 시간이 오래 걸렸다면 독일 통일이 이뤄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베를린=연합뉴스)
독일 통일 어떻게 이뤄졌나?
베를린장벽 붕괴 후 11개월 만에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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