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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상한 정부 발표…핵안보 '비정상' 회의?

핵안보 정상회의 발표 '촌극'

[취재파일] 이상한 정부 발표…핵안보 '비정상' 회의?
오는 24~25일 열리는 핵안보 정상회의 대통령 순방 일정 발표가 어제(21일)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엔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한일 정상이 얼굴을 맞대는 회담 일정이 포함돼 있어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 떠넘기는 靑…당황한 외교부

그런데, 어제 하루 발표 과정은 '비정상' 그 자체였습니다. 아침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곧 순방 일정 발표가 있을 거라고 예고하면서, 유독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선 "오후에 외교부에서 발표가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대변인이 그날 있을 정부 일정을 밝히면서 "있을 것 같다"는 애매한 말을 한 것도 아마추어 같은 행태였지만, 한·미·일 정상회담 일정만 뚝 떼어내 외교부로 넘긴 것은 더 이상했습니다.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청와대가 아닌 부처에서 발표한다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정상회담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외교부는 이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외교부 대변인실에서는 즉시 기자들에게 "민 대변인이 뭔가 잘못 알았던 것 같다. 외교부에선 전혀 발표 계획이 없다"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오전 10시쯤 청와대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 나서 "왜 한·미·일 정상회담을 외교부에서 발표하는 지도 외교부에서 밝힐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외교부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부랴부랴 논의한 끝에 점심 직전 기자들 휴대폰으로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핵안보정상회의 시 한·미·일 정상회담 관련 발표문제는 청와대 대변인이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맥락을 아는 출입기자들로선 '청와대 대변인 말씀에 그냥 따르겠다'는 불편한 심기가 담겼다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갑자기 준비하다보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겁니다. 외교부는 이날 오후 4시 30분 단 두 문장으로 이뤄진 서면으로 발표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정부 첫 한일 정상회담인데, 충분한 설명과 공식 발표를 원했던 기자들로서는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녁 8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이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그제서야 일본이 4월 중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을 하자고 해서, 이번 한·미·일 회담에 응하게 됐다고 설명에 나섰지만, 기자실에선 "핵안보 정상 회의가 아니라 '핵안보 비정상 회의'로구만" 하는 비아냥이 나왔습니다.
그래픽_청와대

♦ 청와대는 왜?…'무능' 혹은 '무책임'

국가 정상들이 만나는 행사 발표를 하면서 이 무슨 촌극이란 말입니까? 청와대와 부처 간에 사전 조율 없이 엇박자를 내는 모습을 보였는가 하면, 급하게 준비한 발표는 부실했고, 결국엔 청와대 대변인이 스스로 한 말을 주워담고 직접 발표하기까지...이젠 새 정부도 아니고 2년차에 접어드는데 아직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청와대가 왜 그랬을지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말 실수를 했을 수 있습니다. 보통, 청와대에서 오전에 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하면 오후에 외교부 등 유관 부처에서 백브리핑(당국자의 비공식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민 대변인이 외교부에서 백브리핑을 하는 걸 공식 브리핑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어제 일은 청와대 인사의 무능과 그 무능을 덮기 위해 벌어진 사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실수가 아니라 청와대가 일부러 외교부로 떠넘긴 거라면? 과거사에 대해서 충분한 반성 없는 일본과 정상회담을 한다는 걸 밝히는 게 청와대로선 부담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잡한 사안을 청와대가 나서서 설명하기보다 외교부에서 발표하는 게, 파장을 축소하면서 돌아올 비판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어제 일은 청와대의 무책임과 비겁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지요.

'무능' 때문이든, '무책임' 때문이든, 청와대의 어제 모습은 적어도 당당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실수였다면 빨리 바로잡으면 그만이고, 비판이 예상된다면 직접 나서서 책임 있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합니다.

♦ 위안부 문제와 연계, '신의 한 수' 될까?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어제, 최근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4월 중순에 진지하게 협의해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고, 그것이 이번 한·미·일 회담에 응하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일본에선 이미 일주일 전부터 기정사실로 보도되던 한미일 정상회담 발표를 정부가 왜 이토록 미뤄온 것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정부의 기존 입장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조치가 없으면 정상회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 성사도 불투명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음달 없던 일정을 만들어내 오바마가 방한하기로 한 만큼 미국의 요구를 마냥 거부하기가 사실상 힘든 측면이 있었습니다. 또 북핵 문제 등 지역안보와 관련해 일본과의 협력을 계속해서 미뤄둘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일본 측은 아베 총리가 고노담화 계승 발언을 하는 등 제3자의 눈엔 성의로 비칠 수 있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외교부 내에서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지역안보 문제를 '분리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조가 형성됐습니다.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정부가 이런 분리대응 방침을 공표하면서,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을 설득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부가 시민들로부터 비판은 받겠지만 동시에 이해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당장 비판받지 않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번 정상회담 수용과 위안부 문제를 연계시킨 겁니다. 실제로 다음 달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회의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한일 간 입장차가 여전한 것만 확인한다면, 청와대가 모든 걸 알면서 국민을 우롱했다는 더 큰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한미일정상회담_50
♦ 甘呑苦吐 경계해야

더 큰 문제는, 어느 정도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이 생겼을 때, 청와대가 국민을 상대로 충분히 설명하면서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입을 틀어막고 쉬쉬하면서 말 나오지 않게 처리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겁니다.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 논의에서 한일 간 언론보도 차이를 보면 이런 점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일본 언론은 이미 한·미·일 정상회담이 논의될 때부터 결정되기까지 그 과정을 세세하게 보도하면서, 일본의 국익에 어떤 이익이 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정상회담이 결정되기까지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당국자들이 입을 닫아 걸었기 때문입니다. 외교부에는 '결정된 바 없다', '아는 바 없다'라고 말하라는 언론 대응 지침이 떨어졌습니다. 막바지에는 아예 기자 전화를 받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려졌고, 일부 언론에 특정 코멘트를 한 당국자를 찾아내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오기도 했다고 외교부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어쩌면 기자는 정부가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국민입니다. 기자에게도 입을 닫아건 정부가 다른 국민에겐 오죽하겠습니까.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옳은 길이라면 자신있게 설명해야 합니다.

청와대가 통일, 외교 등 각 부처들의  키를 쥐고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빛을 볼 수 있는 부분만 취하고 부담스러운 사안은 부처로 떠넘기는 모습을 보이는 건 곤란합니다.  비판도, 책임도 함께 감내하며 국민에게 당당한 청와대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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