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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투서에 발끈해 ‘보복 감찰’ 지시한 경찰

[취재파일] 투서에 발끈해 ‘보복 감찰’ 지시한 경찰
지난해 11월 경찰청에 익명 투서 하나가 날아들었습니다.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한 경찰서 A 형사과장의 비위 의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A 과장이 지난해 7월 ‘살인 혐의로 붙잡힌 피의자를 감시하던 형사 2명을 사적인 일에 동원했다’는 겁니다. 피의자는 자해를 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A 과장의 명을 받은 팀장 지시로 형사 2명이 차출돼 과장 사택에 가 짐을 날랐다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의혹은 A 과장이 과거 다른 경찰서 근무 때 ‘공업사에 차량 수리를 맡긴 뒤 수리비 600만 원 가량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청은 경기지방경찰청(경기청)으로 투서를 이첩했습니다. 경기청이 A 과장을 조사한 결과 차량 수리비 부분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근무 중인 직원을 사사로이 부린 점이 인정돼 감사담당관의 ‘구두 경고’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구두 경고는 정식 징계는 아닙니다. 같은 시기 부하 직원을 동원해 고향집 감을 딴 경찰 하위 간부를 ‘감봉 2개월’에 처한 부산지방경찰청 처분과 비교됩니다.

문제는 조사 과정에서 벌어졌습니다. 경기청 조사를 받은 A 과장은 이 내용을 서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었던지, 후배 청문감사관에겐 자신에 대한 투서까지 불러온 ‘악성 소문’의 근원을 찾으라는 비공식 주문도 합니다. 청문감사관실이 투서에 담긴 의혹의 ‘출처’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찰 조직 감찰 기능이 공식 절차가 아닌, 개인의 사사로운 주문으로 작동한 겁니다. 아직 A 과장 본인에 대한 조사가 종결되지도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보복 감찰'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청문감사관실은 A 과장 개인 사역에 동원된 형사들을 포함해 형사과 직원 다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A 과장의 짐을 날랐던 두 형사 가운데 한 사람이 ‘정직 1개월’이란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인사에 대한 불만을 품고 상관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해 경찰 품위를 손상했다’는 게 징계 혐의 요지입니다. 해당 형사는 자신은 투서와 관련이 없고, 조사 과정에서 별 다른 해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며 조만간 소청을 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관
청문감사관실 관계자는 투서를 누가 한 건지 자신들은 모르며, “‘투서 당사자’를 찾아 응징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일선 경찰서 감찰 조직이 경찰 본청에 들어간 투서의 당사자를 ‘공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저 A 과장이 억울함을 호소하니 그런 투서를 불러온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던 것뿐이란 입장입니다.

A 과장은 자신이 비공식적으로 감찰을 주문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음해의 피해자”로서 당연한 대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역시 투서 당사자가 누군지는 알지 못한다면서, 알 수만 있다면 자신을 무고한 죄로 고소하고 싶다고 이를 갈았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으며 상관으로서 부하들 사이에 영이 서겠느냐”고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투서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무기명은 무책임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투서 받고 칼날 휘두르는 자’들이 투서에 담긴 내용과 의미 앞에서 몇 번씩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안에 아무리 매력적이고 화끈한 얘기가 담겼다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언론은 물론, 사정기관과 조직 내 감찰 기능을 수행하는 자들은 다 이런 인식 위에 서 있습니다. 무책임한 허위 사실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한 채 보고 듣는 투서요 소문입니다. 다만 그 내용을 확인해 사실이면 시정을 할 일이고 아닐 땐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A 과장만 이 ‘투서 읽는 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의 분함을 십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난생 처음 감찰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게 한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겁니다. 그래도 그가 ‘그깟 투서’에 과잉 대응했다는 인상은 지을 수 없습니다. 공교롭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투서에 담긴 두 가지 혐의 가운데 감찰에서도 인정된 개인 사역 ‘피해자’를 중징계로 내몰았습니다. 그는 부하들 사이에 영이 서는 게 중요하다 말했는데, 이런 식으로 세우는 영이 얼마나 굳건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약자의 투서엔 소극적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무기명으로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까. 어디 하소연 할 데 없고 제 힘만으로는 현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택하는 손쉬운 방식이 바로 투서입니다. 언론사와 수사기관에 투서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작은 투서에서 시작해 무수한 언론의 특종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사가 되어 세상을 바꾼 예는 많습니다. 이런 투서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투서의 뿌리를 색출하는 조직이라면 누가 감히 투서를 하려 할까요. 언로가 막히고, 조직이 썩고, 사회가 병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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