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매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던 대표적인 우익정치인이다. 정계를 떠나 고향에 파묻혀 지내던 老 정치인이 2013년 가을 다시 TV에 등장했다. 느닷없이 '탈 원전'을 내세우며 즉각적인 원자력 발전 제로를 주장한 것이다. 고이즈미의 이런 변신은 곧장 화제가 됐다.
일본인들에게 역대 총리 평가 2위에 오를 정도로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이 막강한 고이즈미가 좌익의 정치 아젠다(의제)를 들고, 시민 앞에 나섰기 때문이다.
총리 재직시절 '원전 찬성론자'였던 고이즈미 전 총리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뭘까?
역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근본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일본 언론이 거론하는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2013년 8월 핀란드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최종처분장' 견학이다. 당시 학자, 원전 관계자들과 함께 최종처분장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플루토늄의 반감기는 2만 4천 년이고, 생물에 해가 없어지려면 10만 년 동안 묻어 둬야 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고이즈미는 "일본은 10만 년간 원전 쓰레기를 묻어둘 만한 땅이 없다" "원전은 쓰레기 처리 비용과 안전 비용을 고려하면 결코 싸지 않다" "정치인이 나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 자민당만 방침을 바꾸면 모든 정당이 원전 반대에 찬성한다."라고 주장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주장은 파문을 일으켰다. 민주,사민,공산당 등 야당이 고이즈미의 주장에 동조했고, 시민단체도 가세했다. 고이즈미는 전국을 돌며 '탈 원전' 강연을 펼쳤다. 무엇보다 일본의 전력 사정이 고이즈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 일본 원전은 모두 54기가 가동되며, 전체 발전의 29%를 담당했다. 현재 일본은 가동 중인 원전이 하나도 없는 '원전 제로' 상태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력난을 겪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들도 전력에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원전 가동이 중단된 후, 놀고 있던 화력발전 시설과 기업의 자가발전 시설을 최대한 가동하면서 원전을 충분히 대체한 것이다. 이런 원만한 전력 사정이 '원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이자 자민당 총재인 아베 총리의 생각은 달랐다. 아베 정권은 '원전'을 성장전략의 하나로 간주했다. 아베 총리는 고이즈미의 주장을 '무책임한 발언'이라며 무시했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는 오히려 아베 정권이 무책임하다며 반발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당하고도 아무런 정책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은 정치인의 도리가 아니라며 '승부수'를 던졌다. 2014년 2월 9일 '도쿄도지사 보궐선거'가 그 무대였다. '탈 원전'을 주장하는 호소카와 전 총리를 후보로 내세우고 자신은 유세장을 돌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아베 정권과 '한판 승부'에 나선 것이다. 고이즈미는 측근들에게"자민당의 원전 정책 변화를 도쿄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라는 얘기를 했다. 호소카와도 주변인사들에게 "도지사선거는 일본의 운명이 걸려 있다. 지고 이기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다."라고 말했다.
결과는 '탈 원전'의 참패로 끝났다. '고이즈미-호소카와' 연대는 90여만 표를 얻었고, 아베 정권이 지원하는 후보는 2백만 표를 넘게 얻었다. 고이즈미는 선거 전날 "원전사고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다. 내일은 일본의 운명이 걸려 있다."라고 말했지만, 선거는 '탈 원전'보다는 '복지와 경제'가 쟁점이 되었다. 일본 시민의 60% 이상이 '탈 원전'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에도, 도쿄도지사 선거는 그런 여론이 반영되지 못했다. 고이즈미는 참패 뒤, "아쉬운 결과지만 앞으로도 '원전 제로'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미력이나마 노력을 계속하겠다."라고 말했다.
한 우익정치인의 반란, '보수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 대담한 도전은 아베 정권에 막혀 일단 길을 멈췄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고 민심도 변하기 마련이다.일본인이 진정으로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순간 '탈 원전'은 다시 부활할 것이고, 그때 백발의 사자 머리를 휘날렸던 老 정치인의 혜안은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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