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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토크] 전시장에서 '유쾌한 그녀' 를 만나다

# 전시장에서 '유쾌한 그녀' 를 만나다 - 정연연 작가…Remember Your Heart 전

그림을 봤다.

금박을 두른 바탕 위에 가녀린, 한편으론 요염하고 관능적인,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여인들이 갤러리 안 벽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작새의 깃털만큼이나 풍성한 무언가를 머리에 잔뜩 이고 있는 모습의 다양한 표정의 여인들이 있었다.

도발적으로 관객을 노려보기도 하고, 뇌쇄적인 눈빛과 표정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더러는 관능적인 몸짓을 보낸다.

작품들을 보면서 문득 이토록 농염하고 또는 허무적이고, 유혹적인 여성을 그린 작가는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인터넷을 뒤져 프로필을 검색하자, 도시풍의 여자가 도도한 모습으로 '나 여기 있어요'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저 그런 평범한 스토리였다. 

작가가 인터뷰를 위해 갤러리로 온단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갤러리 안이 약간 소란스러워져 돌아 보자 작은 키의 여자가 보인다. 쭈글쭈글한 청색 진셔츠에 면바지 차림의 전혀 작가스럽지(?) 않은 여자. 말괄량이 삐삐를 닮은 호들갑스런 여자. 그 여자가 작가였다. 이런, 갑자기 영화 대사 떠올려진다. '이건 배신이야 배신!'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프로필은 사진 기술의 개가란 말인가?
이건 뭔가요? 하고 따져 물었더니 프로필 사진을 찍었을 때보다 지금은 살이 더 쪘단다. 그래도 이건 반전이다. 많이 다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 보자 호들갑스러운 게 아니고 유쾌하고, 성향이 뚜렷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열정이 넘치는, 그러면서도 자기 확신이 돋보이는, 어쩌면 당돌해 보이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무언가 내면 속에서 할 말이 많은 사람임이 느껴진다. 아픔을 삭여서 스스로를 단련시킨 흔적들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그녀는 여자가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을 그렸고, 그것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의 역사적, 사회적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시각화했다고 말한다. 그 사회적 삶 속에는 개인적인 삶의 흔적들도 배여 있을 수 밖에 없으리라.

그녀의 작품 속 여성의 모습은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몽환적이고 관능적이며 때로는 도발적이다. 대담하게 화면 밖으로 관람자들을 응시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지친 내면이 드러나기도 하고, 또 관능적으로 누군가를 유혹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을 던지기도 한다.

여성 두 명이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듯한 작품도 있다. 남성들이 여성의 동성애에 갖는 판타지를 드러내는 그림이란다.

작품 속 여인들은 어떤 모습이든 갈증과 갈구의 모습이 읽힌다.
그녀들은 홍조 띈 얼굴로 누구를 유혹하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여성들이 동안이나 섹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은 남성적 취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본다. “‘피부가 예쁘면 여자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 등 남성 취향에 맞춰 가려는 여성들이 현실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는 시간을 애써 강제로 멈추게 하려는 동시에 더 앞서 가려 하는 압박된 삶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지적한다.
작가는 이러한 형태야말로 여성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녀는 '내가 내가 아니고, 누군가의 시선, 특히 남성을 통해 보여지는 스스로 모습에 매몰되어 있는 요즘 여성'을 표현했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역행하려는 외모지상주의을 향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이 작가가 이번 전시회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란다.

특이한 건 정연연 작가의 그림 속 여인들에게는 눈썹이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눈썹의 모양에 따라 갖게 되는 인물의 인상에서 오는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일부러 눈썹을 없앴다고 한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은 여성으로서의 보편적인 인간상일 뿐이고 개성을 지닌 인물로서의 개별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눈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모습(눈썹)을 통해 본질(사람의 본 모습)을 왜곡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기는 해도, 편견이나 선입관을 주는 게 어디 눈썹뿐이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가는 눈썹을 그 상징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무심결에 작가의 눈썹을 봤다. 작가의 눈썹은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었다.

정연연 작가는 자신의 어쩌면 불우했던 성장기를 털어놓는데도 거침이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성장 과정까지 어렵지 않게 얘길 한다. 아주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듣는 이는 마음이 아파 오는 성장사인데도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남 얘기하듯 한다.

문득 작가가 세상의 편견과 선입관에 대해 고민하는 다른 이유를 스스럼없이 터놓는 자신의 성장사를 통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는 짐작을 해 본다. 어쩌면 개인사적인 아픔과 이를 극복해내며 살았던 투쟁적인 삶이 지금의 여성관을 갖게 하고, 그 작품 속의 특징들이 생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살아 내야 했던 과거의 기억들은 분명 그녀에게는 다양한 선입견과 편견과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Remember Your Heart' 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2014년 신작 작품들은 배경 전체를 금박으로 채워 화려함을 강조했다. 배경이 화려할수록 작품 속 여성들이 슬퍼 보일 거라는 기대에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금박 배경이 아니라도 여인들의 표정은 충분히 슬프고 아프다. 그러나 아프고 슬픈 이유가 외모지상주의 때문이라면 그건 절망적이기도 하다.

사실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 그림보다는 작가가 훨씬 궁금했고, 작가와 길지 않은 대화를 통해 용기와 즐거움을 선물 받았다.

올해 나이 서른 셋. 또래 작가들이 작가에 갓 입문 할 나이에 정연연 작가는 스무 살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개인전만 열 다섯 번 이상 가졌다고 한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20대 초반에는 몇 년간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3년 남짓 직장 생활도 했다고 한다.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본인이 4차원이라 직장 생활이 힘들었지만 전세 대출이 있어 스스로 정한 3년 기한을 다 채웠다고 한다. 하지만 조직 생활의 경험은 사회 경험이 적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자양분이었고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불우한 개인사도 겪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경험은 아마도 그녀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켰으리라.

그리고 어떤 그림에는 아주 작은 숫자가 적혀 있다. 그 숫자의 의미를 물었더니 옛 애인과 만난 날 수란다. 남편도 있는 유부녀가 무슨 용기로 이런 걸 굳이 밝혔냐고 물으니 이 연애가 끝난 뒤 많이 힘들었지만, 이 연애의 끝이 남편과의 시작점이 되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너무나 고맙고 다행스런 끝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정연연 작가는 독특하고, 도발적이고 당돌하다. 

원래 이런 사람이니 결혼도 독특했을 것이란 기대를 저버리 않는다. 만남부터 혼인신고까지 한 달. 초고속 스피드로 결혼에 골인했단다. 동갑내기 남편도 조각 작업을 하는 예술가란다.

듣자 하니, 관계에 방아쇠를 당긴 건 정 작가 쪽이었는데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쉬지 않고 다섯 시간이나 통화를 했단다. 같은 일을 하고 있고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 대화가 잘 통했고, 대면하기 전에 열두 시간 동안 전화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파주와 안동간의 장거리 연애를 하다 한 달도 채 안 돼 신혼살림을 차렸다니 범상한 인물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지금 너무 행복하단다.

작가는 너무나 훌륭한 남편을 만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한다. 갤러리에서 잠깐 그녀의 남편과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 보완적인 참 좋은 인연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남성과 여성은 공존한다. 그 공존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적 시간을 거스르려 한다거나 콤플렉스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름 하나가 늘어나면 그 주름과 어울려 서로 늙어 가는 즐거움이 있지 않겠는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삶을 소중히 끌어안고 콤플렉스를 보듬어 주는 것이 우리에게 옳지 않겠는가.”

정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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