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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학총장추천권 할당, 왜 사려 깊지 못한가 하면…

[취재파일] 대학총장추천권 할당, 왜 사려 깊지 못한가 하면…
역시 삼성이었다. 아무리 지상파 메인뉴스 리포트라 하더라도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내기는 쉽지 않다. 그저 홈페이지 게시판에 남긴 의견들과 포털에 걸린 댓글 수십개, 수백개가 보통이다. 그런데 그 날은 여러 통의 실명 이메일이 내 컴퓨터 우편함에 도착했다. '삼성의 대학별 총장추천 인원 배정, 대학 서열화인가?' 라는 주제의 뉴스를 내보낸 뒤였다. 삼성이 너무 오만해 보인다며 거친 표현을 써가며 비난한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기자의 리포트가 우리 대학의 서열화를 또 한번 부추긴다는 아픈 지적도 있었다. 서울 유명대학의 한 교수는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점잖은 어조로 삼성의 시도가 의미있을 수도 있으니 더 지켜보자는 의견을 전해 주었다. 기자로서 내가 쓴 기사에 독자가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일년에 서너번 쯤 나오는 즐거운 보너스를 즐겼다.

▶삼성, '총장 추천 인원' 통보…대학 서열화 논란 기사 보러 가기

 그런데 이튿날 포털 댓글을 중심으로 다소 악의적인 글들이 올라왔다. 기사의 논지를 정확히 꿰뚫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글이 눈에 띄었다. 삼성이 총장 추천 인원 할당을 통해 대학 서열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러면 어쩌라고?'하며 반문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삼성이 자기들 쓸 사람을 뽑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비단 내 리포트 뿐만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삼성이 처음 시도하는 '독특한 채용 방식'은 이미 화제에 올라 있었다. 짧은 방송 리포트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기에, 내 기사에 반론을 재기한 분들에게 다시 설명드릴 겸, 취재 과정과 내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조정 취재파일
조정 취파
 대학신문의 취재로 시작된 '삼성의 총장 추천 인원 배정' 소식을 메인뉴스에 다루기로 결정한 뒤 이해 당사자인 대학들과 삼성, 취업준비생을 취재 대상에 올려 놓았다. 삼성과 취업 준비생들의 입장은 이미 드러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 삼성 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추천 인원을 통보받은 대학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고, 그날 뉴스의 핵심이었다. 전화번호를 입수해 4명의 대학 관계자들과 통화했다. 삼성으로부터 많은 추천권을 배정받은 몇몇 대학은 제외했다. 모두 서울 시내 유명대학이었으며 취업 관련 책임자도 있었고 대외 홍보실 관계자도 있었다. 각자 몸담은 대학의 특성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이들의 의견은 대동소이했다. 삼성의 일방적인 추천 인원 할당이 매우 불쾌하며, 앞으로 대학 취업 지도에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견해들이었다.

 알려진대로 삼성은 전국 200여개 대학에서 5천명의 학생들을 총장 추천 형식으로 채용 대상에 올리기로 했다. 분명한 것은 총장이 추천했다고 해서 이들을 전부 선발하는 게 아니고, 어떤 시험보다 경쟁이 치열한 삼성직무적성검사 시험, SSAT를 통과해야 비로소 면접을 볼 수 있다. 총장 추천은 단지 삼성이 스스로 없앤 서류전형을 면제해 주는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이 점에 주목한다. 대학이 엄선하고, 총장이 추천하는 사람이면 적어도 필기시험은 면제해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대학에서 기본적인 학식과 교양이 없는 학생을 추천할 리 없고, 대학을 믿는다면 그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성
 또 다른 대학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진단했다. 요즘 워낙 취업문이 바늘구멍이다 보니 학부모와 동창회 등에서는 대기업 취업 실적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대학을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해에 삼성과 현대차 등 대기업에 몇명이 취직했는지는 대입 합격자 발표처럼 대학의 실적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으로부터 50명 추천권을 할당받았는데 학생들을 잘못 추천해 10~20명 밖에 합격시키지 못하면 대학 취업지원 센터는 학부모들의 항의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학생의 잠재력과 품성보다는, 현실적으로 SSAT에서 고득점을 얻을 수 있는 학생들을 추천할 수 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그래야 채용 확률이 높아져 추천인원 대비 최종 합격자가 많아질 거라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터져 나온다고 한결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삼성이 서류전형을 없애 지원자가 20여만명씩 몰리자 학생들을 1차로 거르는 일을 대학측에 떠넘겼다고 비판하는 교수도 있었다. 대학을 삼성의 입시학원으로 만들지 말라는 소리였다.

 대기업의 업무 영역이 최근 이공계열이 많이 필요한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도 이번 사태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업의 필요가 그러하다면 당연히 이공계 학생들을 많이 뽑는 게 맞다. 그런나 이런 면이 추천권이라는 숫자로 드러나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대학들은 자존심을 많이 상했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원 쯤으로 격하된 현실도 안타까운데, 문과 계열의 순수 학문은 이런 숫자놀음으로 평가절하된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거다. 대학 서열화는 그 다음, 다음 문제라는게 대학 관계자들의 이야기였다.

삼성직무검사
 삼성은 우리 사회, 경제의 막대한 부분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책임과 의무도 따른다. 그런데 이번 대학총장 추천권을 배분하는 과정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사전 의견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대학에 통보한 일도 그러하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기준으로 숫자를 나눈 점도 이해할 수 없다. 1등을 차지한 대학이 차순위 대학보다 5명이 많은데 이건 무슨 의미인가? 기계적인 비율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 대학을 간접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내부자 거래인가? 삼성 측이 기준을 제시했지만, 이건 지극히 삼성답지 않다. 어차피 필기시험도 보고 면접도 거치게 할거면 대학 규모를 고려해 '000명 선 추천 요망' 정도로만 했어도 아무 탈이 없었을 것이다. 인원 수를 딱 정해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고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경제부 기자로서 삼성을 감시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 우리 경제가 어려울 때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 만큼 훌륭한 실적을 내 짐을 덜어줄 때는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삼성이 세계 속으로 커 가려면 더 사려깊고 겸손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기업 삼성에 대해서만큼은 '기업이 자기 사람 뽑는데 무슨 상관인가'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통해서도 안된다. 이번 사태로 큰 혜택을 본 몇몇 대학은 벌써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명문으로 이름났는데 삼성의 부름을 많이 받지 못한 A대학과 B대학은 추천 인원조차 숨기며 분을 삭이고 있다. 획기적인 삼성의 '대학총장 추천 채용제도'가 취업 준비생들에게 짐 하나를 더 지운 건 아닌지, 대학 사회와 입시 과정마저 혼란에 빠뜨린 건 아닌지, 그 사려 깊지 못함이 아쉽고 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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