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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납치해도 관대한 나라…"당신의 고통은 내 미래" 걱정

[월드리포트] 납치해도 관대한 나라…"당신의 고통은 내 미래" 걱정
‘납치’는 사전적 풀이로 강제 수단을 써서 억지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범죄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처벌받지 않는 사례가 있습니다. 프랑스 안팎에서 “법은 어디 있느냐?”며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짚어보겠습니다.

6일 오전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 있는 굿이어 타이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경영진 2명을 회의실에 감금했습니다. 회사는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공장을 폐쇄하려 했습니다. 노조는 1,200명의 일자리가 걸린 문제라며 공장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입장 차이는 컸습니다. 노조는 해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평균보다 높은 퇴직금을 요구했습니다. 노조는 직원 1인당 8만 유로(1억1,600만원)를 지급하고 근속 연수에 따라 2,500유로를 추가로 달라고 회사에 요구했습니다. 해고되면 젊은 직원들은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먹고 살아야 하고, 나이 든 직원들은 직장을 가질 희망이 없으니 그 정도는 보상해야 한다는 게 노조의 논리였습니다.
서경채 특파원 취재
협상은 결렬됐고, 노조는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 마자 전격적으로 경영진을 감금했습니다. 방송 뉴스에서는 회의실에 갇힌 긴장된 표정의 경영진을 보여줬습니다. 10여 명의 노조원들이 경영진을 둘러싸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긴박함과 동시에 느슨함도 엿보였습니다. 그들은 때로 함께 웃기도 했습니다. 노조는 경영진에게 먹고 마실 것을 제공했습니다. 마셨는지 모르지만 탁자 위에 포도주도 놓여 있었습니다. 외부로 휴대전화 통화도 허용했습니다. 신체 위협이 목적이 아니라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영진은 30시간 넘게 붙잡혀 있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풀려났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스내핑’(boss-napping)이라 부릅니다. 상사(boss)를 납치(kidnapping)한다는 단어를 조합해 만든 용어입니다. 지난 2009년 소니의 프랑스 법인 직원들이 해고 조건을 놓고 협상을 하다 경영진을 공장 안에 감금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3M, 캐터필러 등 프랑스에 진출한 여러 기업들의 경영진들이 비슷한 이유로 감금됐다 풀려났습니다. 우파 정부인 사르코지 전 대통령 때 유행하다 한동안 사라졌다가 좌파 정부 집권기인 지금 다시 등장했습니다. 

영미권 언론은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습니다. 지난 해 이 공장을 인수하려다 포기한 미국 타이탄 사의 테일러 회장의 반응이 집중적으로 소개됐습니다. 테일러 회장은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납치’라고 부르고 이들을 체포해 기소한다”면서 “프랑스 정부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미친 짓이다”라고 비난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인질 잡기”, 영국 일간지들은 “보스내핑의 부활”이라고 우려했습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과 CNBC는 프랑스의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뉴욕타임스도 노동자의 위급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기업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강화하고 있다고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서경채 특파원 취재
영미권 언론이 지적한 것처럼 보스내핑은 법적으로 분명히 ‘납치’인데 프랑스에서는 거의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형법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 범죄입니다. 납치의 행태에 따라 최대 종신형까지 처할 수 있는 중대 범죄입니다. 굿이어 타이어 공장 사례처럼 감금됐다 7일 이전에 풀려나면 가해자, 즉 노조원은 최대 5년형과 7만5천 유로(1억9백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2009년 이후 지금까지 15건의 보스내핑이 일어났지만, 단 한 건만 기소됐습니다. 테일러 회장의 말처럼 프랑스 검찰과 경찰이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벌 수위도 낮았습니다. 2010년 우체국 경영진을 감금한 11명의 우체부에 대해 1,500유로(217만원)의 벌금형을 처한 게 유일한 제재였습니다.

프랑스의 한 법률 전문가는 “판사들이 보스내핑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는 걸 꺼려한다”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노동자들이 벌인 납치가 적극적인 폭력이라기 보다는 필사적인 행위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생존의 문제라는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피해자인 기업들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관련 기업들이 언급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속내를 알 수는 없습니다. 프랑스 언론은 기업이 노조의 보복을 두려워하거나 고소를 해서 사회적 논란으로 확대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추정했습니다.

프랑스 언론이 보스내핑이 프랑스의 전통이 돼 가고 있다고 개탄할 만큼 프랑스 사회도 고민이 많습니다.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는 관용의 한계를 논하기도 합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외국인 투자가 늘지 않는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기업하기 힘든 나라로 낙인 찍혀 일자리가 줄어들까 걱정도 합니다. 그렇다고 갈등의 현장마다 늘 법 질서 확립을 외치지 않습니다. 득달같이 시장의 자유를 ‘절대선’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이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며 ‘공동선’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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