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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가가 연주하는 소품은 더이상 소품이 아니다

정명훈의 손, 지휘봉 내려놓고 피아노 건반을 짚다

대가가 연주하는 소품은, 더이상 소품이 아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품 앨범(Myung Whun Chung, Piano, ECM)을 들으면서 새삼 느끼는 점이다.

처음 음반을 받은 뒤에는 립핑해서 컴퓨터와 아이폰으로만 듣고 있다가, 며칠 전 처음으로 집의 오디오에 걸어보았다. 볼륨도 모처럼 9시 방향 조금 넘어서까지 올려보았다. 연주자가 페달을 밟았다 뗄 때, 손가락의 가장 바깥쪽 피부가 건반 위에서 미세하게 떨어질 때 등등의 세밀한 느낌이 살아나니, 이 얼마나 섬세하고 절묘한 소리의 조탁인지 실감이 난다.

첫곡 드뷔시의 '달빛'부터 소리의 변화가 압권이다. 호수 위에 교교한 달빛, 그 몽환적인 변화가 눈 앞에 보일 듯 하다.

이 곡은 워낙 피아노적이다. 피아노로 잘 친 연주를 들으면, '드뷔시는 천재야. 이 곡은 바이올린이나 하프로는 도저히 이 맛을 낼 수 없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를 들을 때 그랬고, 정명훈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 그 생각을 떠올렸다.

이후로 이어지는 선곡도 친숙하기 이를 데 없는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아라베스크, 차이코프스키 4계 중 가을의 노래, 쇼핑의 야상곡 중 두 곡, 모짜르트 '아, 어머니께 알려드리죠' 주제에 의한 변주곡 (일명 '반짝반짝 작은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이며, 심지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도 나온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담은 유명 연주자의 음반은 찾기가 의외로 쉽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 경우 일본DG에서 선집으로 나온 필립 앙트르몽의 것과 빌헬름 켐프의 것 정도를 들어본 기억이 있다.

이 음반을 들으며 일관되게 느껴지는 특징은, 지휘자의 연주 답다는 것이다. 소품을 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대하며 음악의 부분 부분을 전개해 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곡은 내가 이렇게 해석하여 스토리를 들려주겠다'는 연주자의 생각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테크닉적으로도 전업 피아니스트에 전혀 밀리지 않지만, 이런 '해석가'로서의 면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정명훈 피아노 독집

정명훈과 같이 유명한 대가가 소품 연주집을 낸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클래식 음악을 여전히 멀게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정명훈이 쳤다며?' 하고 관심을 가질 이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던 분들에게든, 연주자가 달라지면 음악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단순한 듯한 곡이라도 얼마나 많은 변화와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솔로 피아니스트 활동을 병행하는 대 지휘자로는 단연 바렌보임을 꼽을 수 있다. 음악적 자기 주장의 전달이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지휘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페라를 잘 다룬다는 점에서 정명훈과 바렌보임은 유사성이 많다. 바렌보임은 MET 오페라하우스 무대에서 리스트의 베르디 오페라 편곡 작품들로 리사이틀을 여는 등, 피아니스트로서도 스타 이상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정명훈 선생이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만, 아무튼 나는 정명훈의 피아노 연주도 더 많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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