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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헬리콥터 벤은 왜 출구를 택했을까?

미국의 '테이퍼링'…긴축의 정치학

[월드리포트] 헬리콥터 벤은 왜 출구를 택했을까?
  금 본위 통화제가 사라진 이후, 미국 달러화는 그 자체가 금이었다.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종이에 먹물이 주성분일진데 ,그 자체가 10달러도 되고 100달러도 된다. 인류는 오랫동안 경제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왔지만 사실 경제는 어찌보면 사상누각이다. 기계에서 마구 찍어낸 달러라는 종이조각들을 가게에 들고가면 거스름 돈을 주고 손님 대접을 해주니 말이다. 현재의 달러화는 힘이 있는 반면 미국의 존망에 따라서는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 기축통화의 권위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그 당시의 실세 문명이 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다급했다. 시중에 자금을 돌려야 동맥경화에 걸린 덩치 큰 경제 덩어리를 작은 숨이나마 쉬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즉 돈 뿌리기였다. 금리를 사실상 '제로'로 유지하면서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었던 미국 연준은 시중의 채권자산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통화량을 늘리는 변칙적인 정책을 5년 동안이나 이어왔다. 말 그대로 돈을 뿌리는 것인 만큼 마치 마약처럼 효과는 뚜렷했다. 하지만 불안감도 커져갔다. 문제는 그 와중에 이 약을 차마 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중단해야했고 환자가 최대한 타격을 덜 받는 시점을 골라야했다. 당초 월가의 전망은 2013년 12월이 아닌 2014년 3월 쯤이었다. 지난 18일(미국시간) 연준의 발표 직전까지도 많은 증권거래인들이 6대 4 정도로 '내년으로 넘어갈 것'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 밖 발표가 나오자 뉴욕증시는 오히려 급등세를 보였다. 그날은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처럼 주식을 구매했다.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집단심리 같은 묘한 현상이었다.

버냉키캡쳐_500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출구찾기

이번 결정은 크게보면 미국 경제지표의 호전과 버냉키 의장의 정치적 판단이 합쳐진 결과였다. 하지만 양적완화 축소규모는 매우 소폭이었다. 경제이론적으로 볼 때 더 이상 미루기는 어렵고, 막상 하자니 이런저런 걱정이 많다보니 사실상 '생색내기' 성격으로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다.

첫째, 최근 미국 경제지표가 정책적 결정을 내릴 여지를 부여할 정도로 호전됐다는 점이다.  결정 직전의 3분기 미국경제성장률 수정치는 3.6%를 기록하며 전문가들과 시장을 놀라게했다. 최근 두 달 동안 취업자 수는 월 20만명씩 늘어났다. 지난 해 추세보다 월 5만명 정도 늘어난 것이다. 11월 실업률이 오바마 행정부 이후 최저치인 7.0%로 떨어진 것도 그랬다. 소비의 회복세는 환호와 걱정을 함께 불러왔다. 특히 대표적 내구재인 자동차가 잘 팔리면서 10년 만의 최대치를 기록한 것은 경기부양이 더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민망하게 했다. 반대로 이런 현상은 '물가가 안정세인게 이상하다'는 우려를 만들었다. 어디선가 국가 공식통계가 잡아내지 못한 요인들 때문에 물가가 갑자기 성큼 뛰는 상황을 걱정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미국 정치권의 예산협상 타결이다. 사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정치권 입장에선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묘하게 연말 마지막 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와 시점이 맞물렸다. 통화당국이 더 이상 경기부양을 핑계댈 여지가 또 줄어든 것이었다.  세번째는 월가의 이해관계였다. 표면적으론 테이퍼링을 걱정했었지만 속으론 "이제 양적완화 없으면 뭐먹고 사나?" 하고 걱정했던 주식시장은 또 다른 재료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미국의 경기회복은 주식시장에 가장 든든한 재료가 된다. 또 양적완화 축소가 불러올 금리인상으로 채권가치가 떨어지면 돈이 주식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은 발표 직후 증시 급등세의 한 요인이었다. 이제는 약효가 듣지않는 정책자체도 문제였다. 양적완화로 돈을 뿌려도 60% 넘는 돈이 은행의 지급준비금으로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실물경기로 더 이상 유입이 안되는 것이다. 사실 돈을 그렇게 공급하는데도 이상하게 물가가 안정세인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그리고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정치적 배경이 가능성 높게 거론된다. 벤 버냉키의 개인 사정이었다. 양적완화 정책의 대표인물로 워낙 판 크게 돈을 뿌리다보니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런 가정을 해보게 된다. 내년 1월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버냉키 의장은 속으론 자기도 걱정이었을 것이다. "퇴임한 후에 인플레이션이 닥치면 내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까?" 그는 은퇴 전에 뭔가 결자해지하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 기자들도 기자회견에서 이 부분을 집요하게 물었다. "내 퇴임과는 관련없다." 버냉키는 준비한 듯 잘라말했다. 그리고 차기의장인 옐런과 자세하게 협의했다고 빠져나갔다.

'긴축' 대전환의 시작...걱정많은 미국
 

  미국 연방정부 국채이자 문제는 양적완화 정책의 가장 큰 그늘이다. 미국 중앙은행이 양적완화 규모를 축소한다는 것은 정부가 매달 사들이는 미국 국채의 양이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국채 수요의 저하로 결국 채권가치가 떨어진다는 것, 아울러 국채 이자가 높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 정부가 판매하는 국채가 워낙 막대하다보니 금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막대한 이자가 왔다갔다하는데 양적완화 축소로 채권금리가 오르면 미 연방정부의 이자부담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미국 정부는 매년 2천500억에서 3천억 달러를 국채이자로 부담하고 있다.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국채 이자 상승은 그래서 큰 부담이다. 미 연준은 기준금리라도 악착같이 묶어놓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금리의 흐름을 계속 억누르기는 힘들 전망이다.

  미국의 근심을 키우는 두번째 요인은 역시 달러화 강세이다. 이 경우 미국의 수출경쟁력 약화로 최근 회복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무역수지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국제적으로 보면 중국 등의 미 국채보유 국가들의 반발도 미국에겐 고민거리이다. 현재 중국은 1조2천938억 달러, 일본은 1조1천781억 달러의 미국 국채를 보유 중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5조6천529억 달러의 천문학적인 액수가 풀려있다. 한국도 556억 달러를 보유해 보유 순위가 20위로 올랐다. 안정적인 투자 수단으로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최근 미국의 디폴트 위기는 미 국채의 위험성을 일깨웠다. 미국의 출구전략이 국채 가치의 급격한 하락을 부를 경우, 이에 반발한 중국 등은 미 국채 매도에 전격 나설 수 있다.

'최대한 신중하게'..쉽게 버릴 수 없는 QE 카드

혹시 재발할 수도 있는 경기 후퇴는 역시 정책 운용의 잠재적 복병이다. 현재 미국의 소비가 중산층 이상으로만 살아나고 있어서 내년에 회복세가 둔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버냉키 의장은 "앞으로 양적완화의 추가 축소는 데이터에 달렸다. 결과가 나쁘면 한 두번 회의를 건너 뛸 수도 있고 상황이 좋다면 더 빠를 수도 있다"며 사실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겉으로 보면 출구전략의 개시지만 정말 천천히 물에 차가운 발을 담그는 양상이다. 미 통화당국이 금리정책을 사실상 다 써먹은 상황에서 양적완화 카드는 버릴 수 없는 만큼, 내년에도 계속 미 통화정책의 주요 축으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양적완화 축소 발표 이틀 뒤, 미국 상무부는 미국의 3분기 경제성장률을 수정치인 3.6%에서 4.1%로 상향조정해 확정발표했다. 급등 이틀 뒤 힘이 빠지는가 했던 뉴욕증시는 이 소식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상향 곡선을 그렸다. 수정치보다 0.5%나 높은 성장률 통계조정은 그 규모가 세계 최고인 미국 경제라는 면에서 너무나 극적이다. 바로 이틀 전 중대발표를 결정한 미 연준도 버냉키도 아마 성장률 상향조정을 미리 알지 않았을까? 미국의 출구전략은 오랜 고민과 준비,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철저한 시나리오 속에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돌다리도 두드려보는 미국 통화당국의 행보는 경기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불안요소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의 '테이퍼링'이 '될수록 천천히'..정말 조심스럽게 진행될 것이란 전망은 여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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