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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의료진도 못 믿는 병원 혈압계…이유는?

[취재파일] 의료진도 못 믿는 병원 혈압계…이유는?
병원에서 가끔 종합검진을 받습니다. 간호사 앞에 앉아 통과의례처럼 팔을 걷어붙입니다. 혈압을 재기 위해서죠. 펌프를 눌러 압박대를 부풀립니다. “120에 90이요” 이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은 없습니다. 혈압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해봤기 때문입니다. 병원이 보유한 각종 정밀 진단 장비처럼, 혈압계도 당연히 정밀하겠지 믿게 마련입니다. 혈압계는 줄자나 속도계처럼 측정치에 큰 오류가 나면 안 되는 의료 기기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말을, 굳이 해야 하는 상황이 우리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것처럼, 과학자가 혈압계를 진단해봤습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의료융합측정표준센터 박사들입니다. 대전 지역 병원에서 혈압계 477개를 수거해 조사했더니 51개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환자 진료에 부적합하다는 뜻입니다. 혈압계의 측정 오차는 ±3mmHg(밀리미터 머큐리)를 넘어서는 안 되는데, 51개가 이걸 초과했습니다. 혈압계 하나는 오차가 14.4mmHg나 됐다고 연구원은 설명했습니다. 이 정도 오차는 없던 혈압 환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반대로 혈압 환자를 아무 이상 없다며 집에 돌려보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가장 문제가 큰 것은 이른바 아네로이드 혈압계입니다. 압박대와 숫자 계기판이 연결된 간단한 제품으로, 의료진이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조사한 혈압계의 18.2%(187대 중 34대)가 진료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혈압을 숫자 계기판이 아니라 수은 막대의 오르내림으로 나타내는 수은 혈압계는 상대적으로 괜찮았습니다. 7.3%(164대 중 12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나은 제품은 전자식 자동 혈압계입니다. 4%(126대 중 5대)만 오차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의료진 도움 없이 팔을 집어넣고 시작 버튼을 누르면 팔을 압박했다 풀어주면서 액정에 혈압을 띄워주는 그 혈압계입니다. 병원에서는 이런 다양한 혈압계를 여러 차례 이용해, 환자와 환자 아닌 사람을 구분합니다.
못 믿을 병원 혈압
아네로이드 혈압계가 왜 문제인지 궁금합니다. 연구진은 아네로이드의 경우 구조적으로 외부 충격에 약해서, 오랫동안 사용하면 오차가 커지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해가 갈듯 말듯 했습니다. 구조적으로 약하다? 계기판 내부가 보고 싶어서 촬영을 도와주신 박사께 조심스럽게 부탁했습니다. 혈압계 하나 뜯으면 안 되냐고요. 처음엔 어물쩍 넘어가셨지만, 다시 부탁드리자 다른 취재진들의 촬영이 끝나자 하나 분해해도 되겠다고 허락해주셨습니다. 연구진도 아네로이드 혈압계 내부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분명 박사님도 한 번 뜯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아네로이드 혈압계 구조는 예상 밖으로 단순했습니다. 압박대의 공기 압력이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에 전달되고, 그 톱니바퀴가 계기판 바늘을 돌려 120이다 130이다 가리키는 식입니다. 의료진이 떨어뜨리거나, 외부 충격이 가해질수록 부품의 맞물림이 점점 느슨해질 수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반면 수은 혈압계는 이런 톱니바퀴 구조 없이 액체 수은 막대를 밀어 올리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또 전자식 자동 혈압계는 보통 탁자 위에 올려놓고 쓰니까, 들고 다닐 일이 없어 외부 충격으로부터 가장 안전합니다. 혈압계 구조와 휴대 가능 여부가 그 오차에 영향을 미치는 셈입니다.

현재 병원에서는 3가지 혈압계를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동 혈압계로 1차 측정한 뒤에, 문제가 있으면 누군가 혈압계를 들고 와서 2차 측정을 하기도 하고, 계속 문제가 있으면 24시간 정밀 측정한다고 합니다. 측정 혈압계와 측정 시간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혈압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엉뚱하게 환자로 진단 받을 가능성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실제로 혈압에 이상이 있는데, 1차나 2차에서 오차가 큰 혈압계를 만나는 바람에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은 더 큽니다. 안심하고 집에 돌아간 뒤에 언젠가 다시 병원을 찾아가겠지만, 대응은 그만큼 늦어집니다.

이번 조사 결과는 대전 지역 병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다른 지역 병원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연구원은 설명했습니다. 표준과학연구원은 내년부터 병원이나 개인을 상대로 혈압계를 진단해줄 계획입니다. 오차 측정 장비도 직접 제작했습니다. 규모가 큰 병원이면 장비를 들고 직접 찾아가고, 아니면 혈압계를 건네받아 진단해줍니다. 오차가 큰 것으로 나오면 고칠 수는 없는 것인지, 고칠 수는 있어도 비용이 많이 드는지, 이번 조사 과정에서 병원들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혈압계를 모두 폐기 처분했다고 합니다. 의료진부터 혈압계 자체를 못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환자나 의료진이나 이걸로 저걸로 몇 번 재보고, 그러고도 이게 정확한가? 미심쩍어하는 일은 없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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