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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조양은 개과천선 그리고 비참한 말로

우리시대 흑역사, 그리고 그 자화상

[취재파일] 조양은 개과천선 그리고 비참한 말로
1975년 1월 2월, 새해 벽두부터 서울 명동 사보이 호텔은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조직폭력배 수십 명이 생선회 칼과 쇠파이프, 야구 방망이로 무장했습니다. 당시 명동 주먹세계를 주름잡던 사람은 신상현.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으로 ‘신상사파’의 거두였습니다. 하지만 조양은 세력은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게 됩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승리를 한 조양은은 서울 조폭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신상현은 쓸쓸히 퇴장합니다. 유명한 ‘사보이 호텔 습격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 조폭사(史)의 판도를 바꿔놨습니다. 광주 출신의 조양은, 즉 호남 세력이 서울 주먹계를 장악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본격적인 조폭 무장이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잔혹성’의 서막입니다. ‘주먹’을 사용하면 ‘건달’, ‘칼’을 들면 ‘양아치’로 생각했던 깡패들의 낭만은 종식됐습니다.

하지만 조양은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계속되고 있는 유신 정국 속에 조직에 대한 일제 단속이 시작됐습니다. 조양은은 5년 뒤인 1980년 범죄단체결성 혐의로 구속됐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거두로 부상한지 불과 5년 만입니다.

1995년, 만기 출소한 뒤 그는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습니다. 이번엔 범죄가 아니라 ‘개과천선’이었습니다. 옥중에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하고, 교회를 다니며 간증을 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자신을 주제로 만든 영화 ‘보스’에 출연해 주연까지 도맡아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히로뽕 밀반입 시도 등의 혐의가 적발돼 징역 2년을 선고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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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출소한 그는 다시 개과천선을 선언합니다. 이제는 정말 신앙생활에 전념하겠다며 IMF로 실직한 노숙자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에서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2001년 도박과 협박 혐의로 다시 구속됐습니다. 2010년에는 유흥업소를 통해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가 적발됐습니다. 강남에서 유흥주점 2곳을 운영하면서 담보 서류를 허위로 작성해 저축은행에서 44억을 대출받아 가로챈 혐의입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조양은은 바로 필리핀으로 도피했습니다. 필리핀에 머무르면서 현지 교민과 관광객을 상대로 폭행과 협박을 해 수억 원을 뜯어낸 혐의도 포착됐습니다. 결국 인터폴의 공조로 필리핀 현지에서 붙잡힌 조양은은 다시 한국으로 송환돼 철창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경찰서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그는 “사건이 있어서 나간 게 아니라 시끄러워서 나갔다”, “그런 일이 없으니 조사하면 다 나온다”고 혐의를 적극 부인했습니다.

조직폭력의 역사는 우리시대 일그러진 근대화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조폭은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언론에서조차 미화됐습니다. 폭력에 관용적인 마초이즘, 수단과 방법보다는 ‘성공’에 가치를 두는 결과주의 덕이겠죠. 그들은 더 큰 이권을 향해 기생했고, 이를 위해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었습니다. 이들 주먹보다 더 센 권력들은 어땠나요. 권력은 조폭을 즐겨 사용하며 아성을 지켜왔습니다. 외적으로 ‘간첩’과 ‘북한’이란 키워드로 유신과 군부 체계를 공고히 했다면, 내적으로는 ‘범죄’와 ‘조폭’을 내세워 치안 정국을 정당화해왔습니다. 그 평가는 역사의 몫이겠죠. 다만, 조폭의 흑역사는 조폭에 가담했던 어깨 혹은 주먹들의 치졸한 기생 방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 근대화와 권위주의의 뒤안길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상과 몰락, 그리고 이어진 개과천선과 재 몰락, 그 쳇바퀴를 하염없이 돌고 있는 조양은의 삶에서도 시대의 씁쓸한 표정이 느껴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먹과 칼 하나로 너무 쉽게 살아온 그들의 개과천선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일컫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삶, 이들에겐 그 진입장벽이 하염없이 높아 보이는 모양입니다. 길들여진 방식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혹은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장벽이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주요 피의자가 잡혔을 때 기자들이 경찰에 '전과'부터 물어보는 건, 이 때문 아닐는지요. 우리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 혹은 여건이 돼 있는지 저부터 반성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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