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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공간'은 우리 문화의 '고갱이'(중심축)"

'공간 사옥' 문화재 등록 추진

[취재파일] "'공간'은 우리 문화의 '고갱이'(중심축)"
드라마 ‘신사의 품격’, 주인공 김도진(장동건 분)이 부하직원의 보고를 들으며 분주하게 사무실로 걸어 들어간다. 벽돌 건물인 줄 알았는데, 유리창 복도가 이어지더니, 온통 유리로 만든 건물로 들어선다. 잘 나가는 건축가의 사무실인 만큼, 건물도 참 멋졌다. 드라마 장소 캐스팅은 역시 남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건물은 서울 종로구 원서동, 현대 사옥과 창덕궁 사이 자리 잡고 있는 건축사무소의 사옥이란다.

이 건물은 ‘공간’이라는 건축사무소의 사옥이다. 한국 건축 1세대인 김수근이 초대 대표로 있었던 곳이다. 건물도 김수근의 작품이다. 1971년 설계를 시작해 1차 본관 건물이 만들어졌고, 2차 본관 건물로 증축해 완공된 해가 1977년이다. 1차 본관이 지어지면서 공간 건축사무소가 여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13명의 직원들이 자기 자리 벽돌을 직접 쌓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붉은 벽돌이 아니라 검은 벽돌을 사용했는데, 서대문형무소를 부순 뒤 나온 벽돌을 건물 벽 중심 벽돌로 ‘재활용’했다. 건물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주변은 다 한옥들이었는데, 검은 벽돌이 한옥 기와들과 잘 어울려서 김수근 선생이 좋아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유리 건물은 김수근의 제자이자, 공간 건축사무소의 2대 대표 장세양이 지었다. 공간 사옥이 창덕궁 옆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건물 어디에서 내려다봐도 창덕궁 비원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장세양은 스승 건물을 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 창덕궁 전경이 보이게 한 스승의 의도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유리를 택했다. 덕분에 차양을 치지 않으면, 공간 본관에서는 아직까지도 창덕궁을 바라볼 수 있다.

공간 사옥은 외경도 외경이지만, 내부도 건축학적인 의미가 크다. 특별한 층 구별이 없이 천장의 높이가 다른 방들이 중첩되어 연결되어 있다. 미로 같은 구조이다. 계단도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더 좁아진다. 옥상과 연결되어 있는 계단은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너비이다. 아래층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이용 빈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검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어두운 곳이 없다. 천장을 비롯해 방마다 나 있는 창으로 자연광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수근의 제자이자, 함께 작업을 했던 건축가 김원은 공간 사옥이 '한국 건축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서양의 건축은 인간을 ‘보호’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벽으로 방을 나누고 개개인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건축은 천지인에 기본개념을 두고 있다. 사람은 하늘과 땅,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공간 사옥도 겉에서 보기에는 단단한 벽돌 건물이지만, 밖과 안이 시원하게 뚫린 내부 구조는 ‘소통’하려고 하는 한국 건축의 미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 덕분인지, 공간 사옥은 한국 현대 건축의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올 초 건축 잡지에서 전문가 100인에게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을 뽑아달라고 했더니, 절반도 넘는 55명이 단연 ‘공간 사옥’을 추천했다고 한다.

공간 사옥은 건축적인 의미 뿐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공간 사옥 지하에는 ‘공간 사랑’이라는 소극장이 있다. 가로 9미터, 세로 12미터의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한 때 많게는 관객 250명까지 수용했다고 한다. ‘공간 사랑’은 현재 우리 문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쟁쟁한 문화인들의 산실이었다. 1977년 건물 완공 이후, 1978년에는 김덕수 사물놀이의 초연이 이뤄졌고, 공옥진의 병신춤도 여기서 시작이 됐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사진작가 김중만도 이곳에서 강연을 했다. 시낭송, 현대음악, 현대무용, 전통굿까지 다양한 장르가 공연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융복합적인 창조적 활동’이 일어난 것이라고 김덕수는 말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건축 잡지도 발간했는데, 건축 뿐 아니라 문화 전 방위를 다루었다. ‘공간’ 잡지에서 2년 근무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공간 사랑’이 하드웨어라면, ‘공간 잡지’는 소프트웨어”라고 평했다. 당시 타임지에서도 ‘공간’의 이런 역할에 주목했다. 오죽하면 김수근을 ‘한국의 르네상스를 이끄는 로렌조’라고 일컬었을까.(로렌조 가문은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오며 가며 보기만 했지, 어떤 곳인지 몰랐던 곳인데, 최근 들어서야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건축인, 문화인들이 ‘공간’을 지키겠다고 나서면서부터다. 이들이 나선 이유는 ‘공간’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1986년 김수근이 세상을 떠나면서 공간 사옥은 사유 재산이 아니라, 공간 건축사무소 법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공간 사옥의 소유주 공간 그룹이 경영난으로 올 1월 부도를 맞았고, 공간 사옥도 매각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각 날짜는 오는 11월 21일, 최저 매각액은 150억 원으로 정해졌다. 새로운 소유주가 공간 사옥의 의미를 알고 잘 보존해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공간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섰다.

사실 그동안 네이버, 현대중공업이 ‘공간’ 사옥을 매입하려는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무산됐다. 가장 좋은 대안도 추진되었었다. 서울문화재단이 ‘공간’을 사들여 재단 사무실로도 이용하면서 김수근 건축박물관으로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서울시 의회에서 행정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제동을 걸었다. 결국 공매 절차를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소유주가 바뀔 경우, 소유주의 뜻에 따라 건물의 형태를 바꿀 수도, 부술 수도 있다. 소위 ‘문화재급’ 가치가 있는 건물이기에 원형만큼은 보존해보자는 뜻이 모였다.

‘공간 지지자’들은 ‘공간 사옥은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다’라며 지난 18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간’을 ‘우리 문화의 고갱이’라고 했다. 고갱이란 사물의 중심, 축이란 뜻이다. ‘공간’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앞으로 건축박물관으로 이용해주기를 당부했다. 유홍준, 김덕수, 김원을 비롯해 건축가 승효상, 영화감독 박찬욱, 배우 유인촌 등 110명이 이 움직임에 참여했다. 사실 이달 초 김수근문화재단과 종로구, 서울시는 문화재청에 ‘공간을 등록문화재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한 상태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공간이 건축된 지 50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류’ 판정을 내렸다. 문화재보호법 상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려면 ‘50년’이 지나야 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법에는 이런 규정도 있다.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할 경우에는 50년이 지나지 않아도 등록이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화가 권진규 아뜰리에 등 33건은 5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등록문화재로 올라 있다.

기자회견은 효력을 발휘했다. 기자회견 다음날, ‘문화재 등록 보류 판정’을 내렸던 문화재청은 ‘등록문화재 등록 여부를 문화재위원회에 올리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음달 10일에 열릴 문화재위원회 심의 대상에 포함하겠다는 것이다. 일단은 ‘공간 사옥’이 등록문화재가 될 가능성은 커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등록문화재가 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소유자의 동의이다. ‘공간 사옥’의 현재 소유자는 채권단, 21일 공매에서 낙찰이 된다면 새로운 소유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새 주인이 문화재 등록을 동의를 하더라도,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다.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등록문화재 외관을 변경하려면 30일 전에만 관할 지자체장에게 신고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공간 지킴이’로 나선 문화인들은 그래서 ‘국민적인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공간의 김수근’ 같은 사람이 나서 사옥을 인수하고,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불어 ‘공간 사옥’이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으로, ‘공간 사랑’은 예전처럼 ‘문화의 산실’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건물이었다면 사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대책을 세우고 조치를 취했어야만 했다. 시기가 늦기는 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는 건 다행이다. 현대 예술사의 한 족적이 남아있는 ‘공간’이 21일, 그리고 12월 10일, 더 나아가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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