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취임 후 처음으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부흥ㆍ국민행복ㆍ문화융성ㆍ평화통일 기반구축' 등 4대 국정기조를 설명하고, 이에 맞춰 편성된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을 제때에 처리해 줄 것을 여야에 요청했다.
하지만 관심은 박 대통령이 야당의 요구에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였다. 민주당과 정의당, 안철수 의원 등 야권 인사들과 진보성향 시민사회·종교계 인사 백여 명은 지난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석회의'를 열고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도입을 촉구한 바 있었다.
◈ 野 사과 요구에 "안타깝다"
정치 현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시정 연설 말미에 나왔다. 박 대통령은 "지금 대선을 치른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도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당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대통령 사과'에 대한 나름의 대답으로 해석됐다.
정치권에서 통상 사과의 뜻을 나타낼 때 쓰는 어법이 있다. 먼저 '사과 혹은 사죄'로 가장 강한 표현이다. 다음이 '유감'이다. 유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란 뜻이나 대체로 직접 '사과'라는 표현을 대신해 완곡하게 쓰는 방법이다.
이 '유감'보다 수위를 낮춘 표현이 바로 '안타깝다'이다. 말 그대로 "뜻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보기에 딱하여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는 의미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사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논란이 생긴 것이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는 정도로 봐야할 것 같다.
청와대는 그동안 이번 사태에 '사과'하라는 것은 대통령 스스로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됐음을 시인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라며 반발해왔다. '안타깝다'는 발언은 바로 이런 고민을 피해갔다. 그러면서도 사과를 요구해온 야당에게는 사과를 받은 것도, 그렇다고 무시당한 것도 아닌 아주 애매한 답을 던진 셈이다.
◈ 특검 요구에는 "국회 뜻 수용할 것… 단, 여야 합의"
박 대통령은 야권이 한 목소리로 요구한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특별검사 도입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최근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포함해서 무엇이든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서 합의점을 찾아준다면, 존중하고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치의 중심은 국회이다. 국회 안에서 논의하지 못할 주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다만 "정부는 여야 어느 한쪽의 의견이나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국회에서 여야 간에 합의해준다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다.
정리해보자면, "정치권이 결정한다면 특검이든 뭐든 수용하겠다. 다만 여야 어느 한쪽의 의견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으니 여야가 합의를 해라. 그러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얘기다. 얼핏 여당이 협상에 나서달라는 주문으로 들리지만 한편 여야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안들어주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야당 입장에선 무조건 비난할 수도, 환영할 수도 없는 혼란스런 메시지인 셈이다.
◈ 박 대통령 "매년 직접 시정연설할 것"
박근혜 대통령은 연설 말미에 "국회를 존중하기 위하여 앞으로 매년 정기국회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며 의원 여러분들의 협조를 구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또 "우리 모두 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지난 일에 묶일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협력해가자"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를 위해 자신과 정부가 의원 여러분의 지적과 조언에 항상 귀 기울이겠다며 미래를 향한 대한민국의 위대한 여정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 미래를, 우리 함께 만들어 나가자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하나가 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키자는 것으로 역대 정권에서 모두 강조해온 얘기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앞서 거론한 말들이 어떤 식으로 실천되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대통령 혼자의 진정성 만으로는 안된다. 여야 또한 국가적 사안에 대해서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거두어 들일 줄 아는 결단과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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