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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영화의 재미'와 '과학적 묘사'의 반비례 관계란?

[취재파일] '영화의 재미'와 '과학적 묘사'의 반비례 관계란?
우주에서도 불이 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우주 어디냐에 따라 다릅니다. 국제우주정거장(ISS) 내부처럼 공기가 있는 곳이면 불이 날 수 있고, 그 바깥의 우주 공간이면 완전한 진공 상태여서 불이 날 수 없겠죠. 영화 ‘그래비티’에서 ISS 내부의 발화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주정거장 안에서도 사람이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산소와 질소를 대기권 농도와 비슷하게 섞은 공기가 천천히 흐르고 있습니다. 우주 속의 정거장 내부는 산소가 존재하는 한, 화재 위험이 늘 도사리는 곳입니다.
우주 화염

불은 날 수 있지만, 그것이 영화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공 스톤 박사는 지상의 불꽃처럼 마구 타오르는 화염에서 가까스로 몸을 피하지만, 우주의 불꽃은 맹렬함과 거리가 멉니다. 과학자들이 우주에서 (공중에 붕 뜬) 액체 연료에 불을 붙이는 실험을 한 걸 보면, 불꽃은 마치 공처럼 동그랗게 만들어집니다. 불을 붙이면 구 형태의 화염이 생겼다가, 연료가 타들어가면서 구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식입니다. 화면을 보고, 저게 불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아주 생소한 장면입니다.
우주 화염

우주의 불꽃이 늘 구의 형태로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평평한 곳에 고체 연료를 놓고 불을 붙이면, 마치 물방울이 유리창에 붙어 있는 듯, 반구 형태의 불꽃이 생깁니다. 또 전선에 불을 붙이면, 나무 꼬챙이에 끼운 기다란 어묵처럼, 긴 원통 모양의 불꽃이 나타납니다. 스펀지의 일종인 메모리폼에도 불을 붙여봤습니다. 그러면 역시 불이 활활 타오르진 않고, 메모리폼의 육면체 모양을 그대로 닮은 불꽃이 보입니다. 불을 어디다 붙이든 연소 반응은 나타나지만 우주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볼 수 없습니다.
우주 화염

불꽃이 마구 타오르지 않는 것은 그곳이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중력이 거의 없는 미세중력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중력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물질들 간의 무게 차이가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달 표면을 아주 천천히 둥둥 점프하면서 돌아다닌 우주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됩니다. 그는 지구 중력의 1/6인 곳에서, 몸무게도 1/6이 됐을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미세 중력의 공간에서는 어떤 물질의 질량은 변함없지만, 무게는 0에 가까워집니다.

공기의 무게를 얘기한 이유는, 그것이 불꽃 모양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촛불에 불을 붙이면, 근처의 뜨거워진 공기는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가벼워진 공기는 곧 위로 치솟고, 불꽃도 따라서 위로 솟구칩니다. 우리가 촛불 모양이라고 알고 있는 가느다란 타원형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우주에서는 촛불에 불을 붙여도,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지기만 하지, 가벼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대류 현상이 없습니다. 결국 동그랗고 얌전한 촛불 모양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중력이 없는 한, 우주에서 활활 타는 불꽃은 생길 수 없습니다.
우주 화염
물론 우주정거장 내부에도 공기의 흐름은 있습니다. 우주정거장 ISS 안에는 공기를 공급하는 장치(Air diffuser)가 6~8개 있고, 바닥과 벽에는 공기를 회수해 온도와 습도를 조정하고 공기를 정화하는 장치(Return register)가 달려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ISS 공기는 강제로 환기가 되는데, 유속은 1~100cm/s입니다. 만일 우주정거장 내부 벽에 불이 붙으면, 불은 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정거장에서 불이 나면, 우선 취해할 조치 가운데 하나가 환기 장치를 멈추는 것입니다. 참고로 1997년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에서 불이 났을 때는, 2분 만에 꺼졌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얘깃거리는 우주 공간에서의 이동입니다. 영화에서는 남자 배우가 우주 공간 이동장치(MMU)를 이용해 이곳저곳을 유영합니다. 잘 보면, 우주인 좌우에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마치 조이스틱처럼 조종해 방향과 추진력을 조절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남자는 허블 우주망원경을 고치다가, 암흑의 우주로 튕겨나간 스톤 박사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 그녀를 구하고, 다시 국제우주정거장까지 데리고 갑니다. 이동장치에서는 흰색의 질소 추진 가스가 칙칙 나오면서 우주인을 움직이게 합니다. 물론 진공에서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추진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미국이 MMU 장비를 처음 쓴 것은 1984년입니다. 알루미늄 탱크 2개를 달고 있고, 각각 5.9kg의 연료를 실었으며, 24개의 노즐이 추진 가스를 뿜어냈습니다. 브루스 매캔들리스라는 우주인이 이걸 등에 메고 역사상 첫 우주 유영에 성공했습니다. 84년에 그를 포함한 3명의 우주인이 MMU를 메고 우주를 6시간 29분 동안 헤엄쳤습니다. 다만 장비가 무거웠습니다. 148kg에 달했습니다. 우주에서 무겁기야 했겠습니까만, 지구에서 그걸 싣고 우주까지 올라가기엔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MMU는 1984년 이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은 1984년일 수 있지만, 허블 우주망원경은 그때 없었으니까, 배경은 그 이후일 수도 있습니다) 나사는 2001년 MMU를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MMU 10년 뒤에 나사가 새로 내놓은 것은 세이퍼(SAFER)라는 장비입니다. 1994년에 처음 시험했습니다. MMU보다 훨씬 작고 단순했습니다. 물론 MMU처럼 비상 상황에만 사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영화는 위성 파편들이 시속 2만km가 넘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급박한 상황에서 시작해, 볼 것도 없이 MMU를 가동하지만, SAFER만 해도 지난 20년간 실제로 필요한 상황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주인과 우주선을 연결해놓은 끈은 아직까지 끊어지거나 떨어져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막막한 암흑의 공간으로 튕겨나간 스톤 박사의 절대 고독, 그건 아직까지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영화 속 우주 공간 이동 장치는 MMU처럼 추진 손잡이는 달려 있지만, 등에 멘 장비의 부피는 실제 MMU보다 훨씬 작아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추진 손잡이가 달린 30년 전 퇴물 장비가, 그림으로 표현하기엔 훨씬 좋아서 등장시킨 것 아닐까 싶습니다. MMU든 SAFER든 영화처럼 장거리 우주여행은 불가능합니다. 우주정거장과 우주망원경은 궤도의 경사각이 달라서 만날 일이 거의 없고, 행여 만나더라도 궤도의 고도 차이가 140km에 달합니다. 그 140km도 둘이 가장 가까워진 순간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순간을 지나면 또 급속도로 멀어집니다.

우주 불꽃의 모양을 잘못 묘사했네, 허블 우주망원경 있을 땐 쓰지도 않던 장비를 등장시켰네, 영화 속 비과학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우주를 실제에 가깝게 묘사하려고 들인 노력을 감안할 때, 제작진은 이 모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작진은 스톤 박사가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귀환할 때, 우주선에 연착륙용 연료가 조금 남아 있다는 설정을 해놓기도 했는데, 실제 우주선 운영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만일 스톤 박사가 활활 타지도 않는 불을 피하려고 했다면, 얼마나 긴장감이 떨어졌을까요. 그 고민도 이해가 갑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비과학적 설정을 '옥의 티'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재미를 위해, 박진감을 위해, 과학적 묘사를 어쩔 수 없이 포기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둘은 반비례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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