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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한 나라 두 대통령?…쪼개진 이집트

혼돈에 빠진 아랍의 봄…우리는 이들의 미래가 될 수 있나?

[월드리포트] 한 나라 두 대통령?…쪼개진 이집트
11월로 접어들면서 사막기후 지역인 카이로에도 계절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하늘엔 몇 달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구름도 목격되고, 벌써 짙은 겨울 스모그가 회색빛으로 악명높은 혼돈의 도시 카이로 도심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자연의 변화지만 녹록지 않은 정세와 맞물려 이곳 시민들의 가슴을 더 답답하게 하는 듯합니다.

30년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내고 뽑았던 대통령은 1년 만에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고, 이젠 무바라크 시절이 그리워질 만큼 숨막히는 억압적 체제가 시간이 갈수록 공고해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혁명 이후 우리도 이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시민들의 자신감은 2년여 만에 깊은 절망과 패배주의의 나락으로 다시 빠져들었습니다. 거리 곳곳의 카페마다 열변을 토하며 자유롭게 정치와 권리를 논하던 열기 대신 깊은 침묵과 적막이 뿌리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합법적 대통령이다.”

그리고 이곳 시간 4일(월) 4개월 전 군부의 쿠데타로 축출된 무르시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재임기간 중에 벌어진 유혈사태와 관련해 살인교사, 폭력 방조 등의 혐의를 적용해 이집트 군부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 것입니다.

그의 건강과 행방을 둘러싼 온갖 소문들이 나돌았지만 일단 무르시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법정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법이 규정하고 있는 죄수복은 끝까지 거부했고, 재판의 불법성을 거론하며 재판부의 권위도 부정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에 협조하기 위한 불법적 재판이며, 자신이 여전히 이집트의 합법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판정 안팎은 어수선했습니다. 안에선 지지자들과 변호인들까지 ‘군부 통치 반대’ 구호를 외치며 재판이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했고, 재판장 외곽에선 무르시 지지자들이 친 군부 언론들의 중계진을 공격하는 등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무르시의 강경한 저항의사와 지지자들의 재결집 조짐은 이번 재판이 다소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는 반군부 시위에 다시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낳고 있습니다.
[아리]이집트+무르

신경이 곤두선 군부…통제와 억압…폭력의 악순환

예상된 반발과 혼란이지만 여하튼 무르시 재판을 계기로 지난 쿠데타 이후 분열된 이집트의 사회상을 다시 목격하게 됩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세력은 임시 대통령을 내세웠지만, 지난 대선에서 무르시를 지지했던 절반의 국민들은 여전히 무르시의 말처럼 무르시를 대통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 나라 두 대통령인 셈인데, 이미 군부의 꼭둑각시가 된 사법부의 판단이 합법성을 가를 판단의 근거가 되겠지만, 많은 국민들은 이런 정치적 의도가 분명한 법치의 그늘에 자신의 판단을 가두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이집트 시민들은 무르시 지지 여부에 상관없이 이번 재판이 무리수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반군부시위 진압 과정에서 무려 천여 명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사람들이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소규모 우발적 충돌 과정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의 책임을 무르시에게 돌릴 수 있느냐는 것이죠.

이집트 언론들은 벌써부터 무르시에게 적용된 혐의가 모두 인정될 경우, 최고 사형선고도 가능하다는 기사들을 흘리고 있습니다. 군부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는 언론들의 논조로 미뤄봐도 이번 재판의 정치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빼앗긴 무르시의 지지기반 무슬림 형제단을 불법화하고 지도부를 대대적으로 검거한 데 이어, 이후 저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무르시를 어떤 형태로든 모욕하고 제거하겠다는 군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다 보니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정부와 그 지지세력들은 반대진영의 움직임에 극도로 민감합니다. 한 격투기 선수는 공개석상에서 무르시 지지의사를 표시했다가 향후 대회출전을 금지당했습니다. 또 지난 무르시 정권 시절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인기를 끌었던 토크쇼 진행자 바삼 유세프는 최근 군부 통치를 토크쇼의 소재로 삼아 풍자했다가 아예 쇼의 방송 자체가 중단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정권의 지지기반인 이슬람 단체들은 물론이고 청년 운동가들과 노조간부들까지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무르시 물러가라'

군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의심받는 진정성

이처럼 안정적 권력 장악을 위해 치밀하게 반대세력을 거세해 나가고 있는 이집트 군부의 움직임은 그래서 그 진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창 진행 중인 이집트의 헌법 개정 작업 등 국가 재건 과정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습니다.

종교 자유의 완전한 보장과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한 이슬람 율법의 배제 등 기존 아랍권에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한 헌법 개정 작업은 이슬람 정당의 정치참여 배제라는 목표와 함께 이집트를 이슬람 국가에서 보통 국가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충실히 담아 내려 하고 있습니다.

무르시 집권 시절 이슬람 율법의 과도한 적용 등 급격한 이슬람화에 불만을 드러냈던 세력들은 이런 군부의 헌법 개정 작업을 전폭 지지하고 있지만 누르당 등 군 과도정부의 권력 이양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이슬람 진영의 격렬한 반발을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진영을 제외하면 다른 비군부 진영도 표면적으로는 이런 헌법 개정 작업에 찬성 의사를 보내면서도 군부의 의도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훌륭한 제도도 권력자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거나 불순한 의도로 운영되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는 것이죠.
 
이처럼 국민들의 가슴 속에 한 나라 두 대통령이 있는 파행적 상황이 지속되는 이집트의 현실에서 국가재건을 위한 묘안이 있을까요? 저명한 중동학자들과 언론인들 대다수는 지난 여름 군부의 무력진압으로 인한 카이로 학살극 이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이집트의 이슬람 진영과 군부가 화해하지 않는 한 장기적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IMF '한국이 발전 모델'…우리는 이들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나?

이런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얼마 전 IMF가 이런 극도의 분열과 혼란을 겪고 있는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의 봄’ 국가들이 한국과 비슷한 발전 경로를 걷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지금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마치 지난 1980년대 초반 내란을 일으키고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내란 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웠던 상황과도 흡사합니다. 그 이후의 숨 막히는 공안 통치와 민주화 세력의 충돌 역시 이집트의 현실과도 맥이 닿습니다.

IMF의 전망은 한국전쟁 이후 이념 대립과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뤄낸 한국이 이집트 등엔 하나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평가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과거의 성취가 훌륭하다 해도 흘러간 유산이라고 여겨졌던 해묵은 이념 대립이 정치의 전면에 재부각돼 분열을 부채질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의 중립성마저 의심받을 정도로 취약하고 지속 불가능하다면 과연 이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세계 최고라 해도 무방할 빈부격차 속에 전 국민의 절반이 하루 1 달러 미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이집트의 상황에서 소수 재벌들의 승자독식 이면에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가계 빚 폭탄 돌리기에 급급한 한국 경제 체제를 롤모델로 삼는 것 또한 무모한 모험이거나, 더 큰 재앙을 초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성취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이 아랍, 특히 이집트에게는 약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종교와 정치, 빈부격차에 따라 갈라지고 찢겨진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치유할 통합과 화해, 함께 살아내는 지혜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한국, 그리고 지금의 한국도 아직 찾지 못한 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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