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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단풍나무 씨앗…고속 회전의 비밀은?

[취재파일] 단풍나무 씨앗…고속 회전의 비밀은?
단풍나무 씨앗 보셨습니까? 언뜻 기억이 잘 안 나시죠. 아니면 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막상 씨앗을 보면 무릎을 치게 됩니다. 어렸을 적 한 번쯤 던져보면서 놀았던 그 씨앗이거든요. 단풍나무 씨앗은 높이 던지면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집니다. 아이들은 씨앗이 떨어지는 곳을 따라 쪼르르 달려가면서 좋아라 합니다. 단풍나무는 그렇게 아이들의 동심을 잘 이용해 나무의 번식을 극대화했습니다. 바람이 민들레 씨앗을 날려주듯, 아이들은 단풍나무 씨앗을 날려줬습니다. 씨앗마다 길이 3~4cm의 날개가 달려 있어서 가능한 놀이인데, 이게 꼭 헬기 프로펠러나 잠자리 날개처럼 생겼습니다.

누군가에겐 추억으로 남아있는 단풍나무 씨앗이, 누군가에겐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포스텍 기계공학과 이의재 학생은 씨앗을 연구실로 가져왔습니다. 밑에서 바람을 불어주는 장비를 설치해 씨앗을 날려보고, 어떻게 회전하는지 초고속 카메라로 찍어 분석했습니다. 씨앗의 정확히 가운데 부분에 구멍을 뚫어 실을 꿰면 씨앗이 공중에서 흔들리지 않고 고속으로 회전하는 진기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분석한 씨앗의 진화 전략을 활용해 같은 바람에 더 잘 돌아가는 프로펠러도 설계했습니다. 특허까지 냈습니다.

씨앗은 대단했습니다. 바람을 타지 않더라도 공중에서 오래 버텼습니다. 낙하 속도는 1초에 1.2미터 정도입니다. 바람만 잘 타면 얼마나 날아갈지 알 수 없었습니다. 씨앗의 낙하 속도만한 바람, 그러니까 초속 1.2미터의 바람을 밑에서 불어주면 씨앗은 공중에 그대로 멈춰 회전할 정도로 안정적이었습니다. 회전 속도는 1초에 1,200회를 넘었습니다. 씨앗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적 설계 능력이 있는 누군가 이걸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의식 없는 단풍나무가 이런 미묘함을 우연히, 그것도 맹목적으로 진화시켰다는 것은 신비롭습니다.

진화의 비밀은 날개의 두께에 있습니다. 단풍나무 씨앗의 날개는 언뜻 평평해 보입니다. 손으로 만져 봐도 두께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방사광 가속기로 날개를 촬영해보면 두께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한 쪽이 약간 두꺼웠던 겁니다. 그 차이는 비행기 날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둘의 구조는 무척 닮았습니다. 포스텍 기계공학과 이상준 교수는, 두께의 이러한 작은 변화라도 씨앗에 양력을 주기엔 충분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씨앗은 그만큼 공중에 오래 떠 있을 수 있고, 뱅글뱅글 돌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씨앗의 진화 전략은 또 있습니다. 날개가 선풍기의 그것처럼 매끈매끈하지 않고, 표면에 일정한 결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날개에 그렇게 돌기가 있으면 공기 저항을 덜 받게 된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골프공 표면에 올록볼록 돌기가 있어서 더 멀리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단풍나무 씨앗은 그래서 최소한의 공기 저항을 받아, 최대한 멀리 날아가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이것도 설계자의 존재를 의심케 하는 자연의 섬세함입니다.

씨앗을 이런 식으로 퍼트리는 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도토리의 경우 포식자인 다람쥐를 이용해 씨앗을 멀리 퍼트리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도토리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는 상당한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고효율일 수는 있어도, 분명 고비용 전략입니다. 반면 단풍나무 씨앗은 저비용입니다. 씨앗에 들이는 에너지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씨앗 하나에 날개 하나씩만 만들어놓으면, 날개가 바짝 마른 뒤에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단풍나무 씨앗은 확산 지향적입니다. 실제로 단풍나무 군락지에 가보면,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바람에 실려 온 씨앗이 뜬금없이 자라 생긴 어린 단풍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울긋불긋함의 근원입니다.

단풍 캡쳐_500


단풍의 붉은 색깔을 내는 색소 '안토시아닌'도 사실 생존의 무기입니다. 단풍잎이 떨어져 안토시아닌이 땅에 흡수되면, 이 색소는 그때부터 다른 종의 식물에 사실상 독처럼 작용합니다. 이른바 타감 작용입니다. 국립산림과학원 김선희 박사는 안토시아닌이 타감 작용을 통해 다른 식물이 싹을 틔우는 걸 방해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산림과학원이 있는 홍릉수목원 뒤편에도 이런 단풍나무의 욕심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단풍나무 군락지 주변을 보면, 다른 곳보다 확실히 잡풀이 적고, 다른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 쉽지 않다는 게 느껴집니다. 꼭 제초제를 뿌린 것 같습니다. 취재진이 찾아갔던 북한산의 단풍나무 주변도 땅이 깔끔했습니다.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풍나무 씨앗의 날개와, 단풍잎의 색소. 이 둘이 결합해 단풍나무는 올해도 다른 나무들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씨앗을 바람에 실어 최대한 날리고, 거기서 새로 싹이 터 붉은 잎이 떨어지면, 다른 나무의 생존을 방해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게 되는 아름다운 붉은 숲은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새로 확장하는데 성공한 단풍나무들의 영토인 것입니다. 단풍 앞에서 와~ 하는 감탄사를 뱉어낼 때는 그 화려한 색의 조화 때문이었는데, 앞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발버둥 치는 단풍나무의 노력도 인정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그 노력은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노력입니다. 가을은, 단풍은, 그냥 몸으로 느끼면 되는데, 제가 감성을 너무 깨버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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