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의 사소하게] 놓쳐버린 류현진 다큐…기회는 잡아야 기회다

이주형 기자 joolee@sbs.co.kr

작성 2013.10.16 17:13 수정 2017.02.14 18: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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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이 어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장 중 하나로 꼽히는 다저스타디움에서 전세계 야구팬들은 물론, 다저스의 '역사'인 前·現 구단주 피터 오말리와 매직 존슨, '다저 블루 블러드' 토미 라소다 前 감독, 80년대를 풍미한 좌완투수 발렌수엘라, '코리안 특급' 박찬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적어도 다저스의 역사에 이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 예비 후보가 될 수 있는 '물건'임을 증명했다.

류현진이 지난해 한화에서 9승을 올렸는데 올해 다저스에서 14승을 했으니, KBO가 MLB보다 훨씬 '빡센' 리그라는 우스개도 있지만, 하위팀 한화의 선발 투수가 불과 1년 만에 물건너 세계 최고리그, 그것도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하니 마치 제트 랙을 느끼듯 약간 時空 혼란감마저 느끼게 된다.

오늘 아침, 업무용 자료를 하나 만드려고 컴퓨터 속 과거 파일들을 들여다보다가 'SBS스페셜' 폴더에 들어있던 '미방 기획서'란 파일을 열어보게 됐다. 미방기획서란 未放, 즉 아직 방송되지 않은 기획안들을 모아놓은 건데, 3개 정도의 기획서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2006년에 쓴 것 들이니 벌써 7년이 지난 것들이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아침 특별히 눈에 들어왔다.기획서
파일명: '송진우.류현진 기획서' <열 아홉, 마흔- 두 투수의 인생도전>

류현진이 아직 10대였던 시절에 쓴 기획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기획서를 가슴에 품고 햇살 따가운 한여름 대전 구장에서 류현진과 송진우 선수 주변을 기웃거리며 어떻게 이들과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풀어나갈까를 고민하던 30대 중반의 한 기자(겸 피디)가 생각난다.

그 기자는, 정상에 섰지만 이제는 내리막길에서 선수로서 끝자락을 준비하는 베테랑 투수와 이제 막 시작했지만 화려한 조명을 받고 정상을 바라보는 풋내기 투수가 서로에게 무엇을 보고 배우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기획서에 쓴 대로 '41살이 19살에게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19살로부터 배우는 41살의 인생 이야기'를 한번 멋지게 다큐멘터리로 전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획은 대전구장에서 찍은 약 4시간 분량의  촬영테잎 4권쯤을 남기고 '접었다' 결과 예측이 어려운 경기 승부, 스포츠를 소재로 한 다큐에 대한 선입견, 부담감 등등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내가 못한 것이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뒤늦게 기획서를 찬찬히 뜯어보니 류현진을 설명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데뷔 첫 해 신인왕. MVP고지 동시 점령 도전. 아픔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팔꿈치 수술로 SK로부터 1차 지명 외면 받아. 동기인 한기주(KIA. 계약금 10억원), 유원상(한화. 계약금 5억5천만원)보다 적은 2억5천만원에 한화 2차 지명'

류현진은 동산고 시절부터 유명한 선수긴 했지만 프로입단 때는 한기주의 1/4, 유원상의 절반 밖에 못받았다는 사실. 심지어 SK로부터 1차 지명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가 써놓고도 지금 다시 읽으니 새삼스럽다. 당시 SK는 포수 이재원을 1차 지명했다. SK도 수십년 만에 한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늘 기회는 누군가의 주변을 유령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다만 본인이 잘 모르거나 외면할 뿐.. 우리는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기회를 아무 생각없이 보내고, 미적거리다 놓치고, 용기가 안나 주저앉으며 날린다.

만약 7년 전 그 때 이 기획을 밀어붙여 SBS스페셜로 방송했더라면 지금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한 한국 출신 명투수의 루키 시절이 제대로 담겨있는 괜찮은 기록물 하나가 남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널리스트란 결국 자신의 눈으로 기록하는 사람이 아닌가.

대신 그 때 아이템은 못하고 건진 물건이 하나 있긴 있다. 당시 루키 류현진이 한화 덕아웃에서 쥐고 흔들어대던 작은 손목 근력강화용 방망이. 류현진이 경기 중 쉬는 시간에 틈틈이 이 방망이를 들고 손목힘을 기르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류현진을 보고 따라서 냉큼 하나 샀으니 추억의 물건 하나는 남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