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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수학여행 간 아들의 전화 "엄마, 친구들이 속옷을 벗기고 놀렸어"

[취재파일] 수학여행 간 아들의 전화 "엄마, 친구들이 속옷을 벗기고 놀렸어"
1.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인문학 용어가 아닙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과학이론입니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가 1961년 기상관측을 하다가 생각해낸 이 원리는 훗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예측이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른바 '초기 조건에의 민감한 의존성', 곧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죠.

나비효과는 결과론적입니다. 모든 일이 종료된 후, 뒤돌아보니 인과관계가 성립할 것 같은 몇 가지 사건들이 발견되고, 그것들을 연관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60년대 만들어진 이 이론이 분야를 막론하고 사랑받은 데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불안을 느낀 인류가 처음으로 사건을 '통제'한다는 기분을 맛볼 수 있게 된 것도 이유일 테고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향후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불안감이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도 하죠. 

2. 수학여행을 간 6학년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분노와 수치심이 전화 너머로 그대로 전달됐습니다. "엄마, 애들이 내가 잠든 사이 팬티를 벗기고 냄새를 맡았대. 냄새가 구리다고,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자기들끼리 키득거려.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면 이 녀석들 모두 경찰에 신고할 거야'

아들은 학기 초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딱히 어떤 사건이 짚이진 않지만, 언제부턴가 친구들이 집단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더니 넘어뜨리고 폭행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그때마다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제발 그만하라고, 우리 아이가 너희들 때문에 하루하루 불행해져 간다고 매달려 울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내 아들처럼 다른 집 아이들 역시 그렇지 않으란 법 없다고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 때마다 아이들을 불러 간식을 해 먹이고 함께 잘 지내라고 타일러 돌려 보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요즘 아이들이 어떤 일을 할 지 몰라 붙잡아 혼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
그런데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아이들은 작정이라도 한 듯, 아들이 혼자 먼저 잠들길 기다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속옷을 내리고 성기를 노출된 채로 친구 여럿이 키득거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공포는 무한대로 커져만 갔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쿨쿨 잤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따져물을 수록 소문이 퍼져나갈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이는 위축되고 학교 가기가 두려워졌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심리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상담사 선생님은 하루 이틀에 끝날 것 같지 않다고 걱정했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이번 사건을 나비효과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좀 더 가해 아동들의 마음을 헤아려 이해했더라면, 담임선생님께 학기 초 더 강력하게 관리해 줄 것을 부탁했더라면, 어떻게든 가해 아동 부모들의 연락처를 알아내 자리를 마련했더라면, 밤마다 잠을 설치며 지나간 시간을 되짚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자책은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취재하는 내내 제 마음 속엔 또 다른 우려가 생겨났습니다. 어쩌면, 이건 나비효과의 결과가 아닌, 새로운 나비효과의 시작이 될 거라는 사실 말입니다.

3. 정색하며 화낼 수 없게 만드는 수위의 말과 행동이 있습니다. '그 때 왜 더 똑똑하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두고 두고 마음에 남아 후회했던 경험, 다들 해보셨을 겁니다. 장난이라고 넘기기엔 불쾌했던 그 기억, 지금이라도 가해자에게 달려가 내가 그 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불행했는지, 설명하고 사과를 받아내고 싶다고, 하루 몇 번씩 충동을 느껴본 적 있으실 겁니다.

이번 일로 아이와 부모님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가해 아동들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학교 측은 유야무야 넘어가길 바라며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피해 아동은 도리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부모에게 걱정시켜 죄송하다 사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건의 책임을 두고 가해와 피해의 구분이 명확치 않게 된 겁니다.

"사내들이 그러면서 크는 거지" 이번 사건을 두고 길거리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한 50대 어머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만 해도, 저희 부모 세대만 해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사건의 피해 아동을 두고 '심약하다' 말할 지 모릅니다. 그 지점이, 피해 아동과 부모들을 주눅들게 만듭니다. 분명 상처를 받고 힘들었는데, '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회의 분위기가 이들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폭력이 추행으로 이어져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걸 표출하지 못하고 감내해야 했던 경험. 가해자의 사과를 듣지 못하고 자책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어야 했던 것. 아이는 앞으로 단체생활을 할 때마다 주눅들고 위축돼야 할 것이 뻔하고, 누군가 내 신체를 마음대로 헐벗기고 놀림거리로 만들었다는 불행한 기억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겁니다. 이번 사건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장난'이 아닌 이윱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자릅니다. 직전에 우진의 구두를 핥는 것으론 부족하다 느낀 겁니다. "미도에겐 비밀로 해줘, 그 아인 잘못 없어." 흐느끼는 대수. 그가 한 잘못이라곤 우연히 학교에서 본 충격적인 장면을 친한 친구에게 말한 것뿐이었는데. 이후에 일어난 일을 온전히 대수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는데. 우진의 복수는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됐을 것이 뻔한,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결과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풍선처럼 커져 터져버렸을 때, 그것이 소리를 내며 주목을 이끌어낼 때에만 관심을 가지고 달려듭니다. 이번 기사가 나간 이후 포털사이트에 이천 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 중엔 어렸을 적 친구들이 무심코 했던 추행의 기억을 털어놓는 내용도 무척 많았습니다. 성범죄자의 상당수가 어렸을 적 성범죄의 피해를 겪은 적 있다는 조사 결과는 너무 뻔해서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의 피해 아동이 정당한 방식으로 친구들에게 사과를 받고, 이번 일이 자책할 성격이 아님을 깨닫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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