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기름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드라이클리닝에 사용되는 석유용 용제, 기름 때문입니다. 드라이클리닝은 건식세탁으로 유기 용제로 빨랫감을 세탁하고 고온의 건조기에서 건조하는 방식입니다. 유기 용제, 기름에 세탁을 마친 빨랫감은 기름 범벅입니다. 이 기름 때문에 건조기 안에는 유증기가 가득 차게 됩니다. 유증기는 기름이 기화돼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으로 조그마한 점화원만 있으면 언제든 폭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조기는 유증기를 밖으로 계속 빼냅니다. 그런데 이 유증기는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 2006년 유증기 회수기를 세탁소에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규제를 시작했습니다.
유증기 회수기는 건조기에서 발생하는 유증기를 모은 다음 냉각시켜 다시 액체형태로 만들어 주는 장치입니다. 환경오염도 줄이고 공기 중에 사라지는 세탁용 기름인 용제도 재활용할 수 있게 해주니 일석이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는 지난해 11월 유증기 회수기 설치 의무 기준을 세탁물 처리 용량 30kg 이상인 대형 세탁소로 완화 했습니다. 대부분 동네 세탁소의 처리 용량은 15kg이기 때문에 설치의무가 사실상 없어진 셈입니다. 정부는 세탁소 종사자가 대부분 고령인데다 세탁소 영업환경이 점점 나빠지는 상황에서 지나친 규제라 판단했기 때문에 규제를 완화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세탁소 업계는 유증기 회수기가 세탁소 폭발 사고의 원인이기 때문에 정부가 규제를 완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드라이 세탁 마치고 건조기에 넣어놓고 밖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안에서 펑하더니 폭발했어요."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세탁소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세탁소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소방당국도 발화지점은 세탁소에 있던 건조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조기에 있는 유증기가 폭발한 것이 화재의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1월에도 유증기 폭발로 추정되는 세탁소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탁소 업계에서는 지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유증기 폭발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세탁소 폭발 사고만 63건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증기가 폭발 사고의 원인일까.
세탁소 업계에서는 왜 유증기 회수기가 유증기 폭발 사고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지금부터 가정해 보겠습니다. 유증기 회수기가 건조기 안에 생긴 유증기를 제대로 빼내지 못합니다. 유증기 회수기를 설치하기 전에는 건조기에서 바로바로 유증기가 외부로 빠졌는데 건조기에 달린 유증기 회수기가 유증기를 바로 빼내지 못해 건조기 안에 유증기가 찰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유증기에 점화원이 있으면 폭발이 이뤄집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유증기가 건조기에 있는 상황에서 고온으로 빨랫감을 건조하면서 건조기 안에서 정전기와 같은 점화원이 발생하면 바로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드라이클리닝과 같은 건식세탁에서 물기가 없는 옷감들이 건조기안에서 돌면 정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위험하다면, 세탁소 업주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제 설치 의무 설비도 아니니 업주 입장에서는 더 부담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업주들이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증기 회수기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죠. 세탁용 기름을 재활용해 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많이 나요."
유증기 회수기를 사용하고 있는 세탁소 주인의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세탁용 기름의 가격은 18L에 3만 6천 원 정도로 비싸다고 합니다. 유증기 회수기를 사용하면 사용한 기름의 약 80%정도를 다시 회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회수한 기름에 화학용품을 첨가해 다시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세탁소 업주입장에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입니다. 돈을 아낄 수 있다는 데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수백만 원이나 투자해 설치한 설비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탁소 업주들은 나름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정전기 방지제를 건조할 때 사용하고, 세탁망에 세탁물을 넣고, 물빨래를 같이 넣고 건조시키면서 수분을 공급해 정전기를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발 사고가 난 세탁소도 이런 노력을 게을리한 건 아니었습니다. 결국 세탁소 업주의 노력과 함께 체계적인 안전 관리가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유증기 회수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라고 한 정부는 안전 기준조차 마련해 놓지 않았습니다.
"유증기 회수기 청소나 점검은 제조회사가 하는데 많이 망해서 이제 서비스를 받을 곳이 없어요."
서울 양천구에 있는 한 세탁소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세탁소 업주들은 유증기 회수기에 대한 모든 것을 제조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제조사의 안전수칙, 제조사의 정기 점검과 청소가 유증기 회수기 관리의 전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유증기 회수기 설치 의무 규제가 사실상 풀리면서 수십 개에 달했던 제조업체가 이제는 10여 개로 줄었습니다. 아무런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문을 닫은 업체 제품을 산 세탁소는 점검을 받을 수도, 고장이 나면 서비스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인 놓인 겁니다.
유증기 제조사들이 실험해 봤더니 건조과정에서 생기는 유증기가 옷감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와 같은 점화원으로 폭발까지 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폭발사고의 책임소재를 놓고 아직까지 공방이 오가고 있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유증기 회수기가 세탁소 폭발 사고의 원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폭발 위험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폭발 위험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증기 회수기는 제대로된 안전 기준도, 관리 지침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도 동네에 있는 세탁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